미국 정가의 로비 실태를 우리 식으로 갑을() 관계에 빗대 비유하자면, 정치인은 갑이고 로비스트는 을이다. 거기서도 일반적으로 로비스트는 선처를 부탁하고, 정치인은 법률을 만들거나 없앨 수 있으니까.
그러나 미국 워싱턴 의회와 K스트리트로 상징되는 로비업계의 먹이사슬은 때로는 이런 통념을 뒤엎기도 한다. 한국 외교가 결코 간과해선 안 될 대목이다.
정치인 줄 세우기=스캔들에 휘말려 얼마 전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majority leader) 자리에서 물러난 톰 딜레이 의원과 후임인 로이 블런트 원내대표는 표 대결의 귀재로 불린다. 최근 4, 5년 사이에 대규모 감세법안, 언론 소유제한 완화, 환경규제 철폐, 작업장 안전기준 낮추기 등 쟁점 법안 50여 건을 한 차례의 실수도 없이 공화당 뜻대로 통과시켰다.
놀라운 능력이다. 비결이 뭘까. K스트리트에선 로비스트를 동원한 하원의원 줄 세우기의 힘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미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만난 전미 로비스트연맹의 래리 보리 수석부회장은 지난해 워싱턴을 달궜던 해외수출기업 감세조항 삭제 법안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유럽이 미국의 감세 혜택을 불공정 무역이라고 비난하자 6월 감세 혜택이 삭제되고, 다른 면세조항이 삽입된 법안이 대안으로 제시됐다. 그러자 보잉이나 허니웰 같은 수출기업들이 펄쩍 뛰었다. 법안의 잠재적 수혜자인 내수 제조업체는 물론 환영했다. 자연스럽게 지역별로 의원들이 양분되면서 수정안이 몇 차례 부결됐다.
딜레이 대표 밑에서 원내총무를 맡고 있던 블런트 의원은 로비스트를 동원했다. 로비스트들의 정치자금 모금력으로 반대파 의원들을 돌려세우기 위해서였다. 공화당의 내분에도 불구하고 표 대결 결과는 251 대 177. 싱거운 승부였다. 워싱턴포스트는 대기업 로비스트의 개입이 절대적이었다는 하원 지도부의 말을 실명으로 인용했다.
선거자금에 목맸다=하원의원들이 로비스트의 설득에 줄줄이 넘어갔다? 그것도 거의 공공연하게. 이런 일은 선거자금 사용에 거의 제한이 없는 미국의 제도 때문에 가능했다. 2년마다 치르는 하원의원 선거의 평균 선거비용은 100만 달러 선. 매주 1만 달러씩 모금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나 선거법은 개인은 2000달러, 대기업이나 노동조합은 1만 달러라는 모금한도를 두고 있다. 의원들은 선거일 다음 날부터 기부자를 찾아 발 벗고 뛰어야 한다.
이런 수고를 덜어주는 게 로비스트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포천지에서 로비업계를 취재해 온 제프리 번바움 기자의 진단이 그렇다.
두 공화당 하원 지도자는 각자 자신의 이름에 주식회사(Inc.잉크)라는 말을 붙인 딜레이 잉크, 블런트 잉크라는 정치자금 모금 조직을 갖고 있다. 박빙의 접전을 치르는 공화당 후보에게 지원되는 선거자금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민주당이 두 사람을 공적() 1, 2호로 꼽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공화당 홈페이지(NRCC)를 보면 12월 14일 하루에만 12건의 하원 의원 선거자금 모금 행사가 예정돼 있다. 한 끼 밥값은 대체로 개인은 500달러, 기업과 로비회사가 정치인 지원을 위해 만든 단체(PAC)는 1000달러 선. 워싱턴의 공정 가격이다.
로비감시단체인 공공투명성센터의 알렉스 노트 연구원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로비업계가 입법 사법 행정부에 이어 제4부()로 불리는 언론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고 말했다.
K프로젝트=로비스트의 정치적 가치를 일찍이 간파한 공화당 지도부는 1994년 행동에 나섰다. 대표주자가 공화당 릭 샌토럼 상원의원. 미국 보수정치 입문서인 우파 국가(The Right Nation)에는 그가 몇 년째 매주 화요일 아침 의사당의 한 회의실에서 주관해 온 비공개 회의가 잘 묘사돼 있다. 어느 로비스트를 행정부나 지방정부로 보낼지, 어느 공화당원을 고소득 로비스트 자리에 배치할지를 논의하는 자리다.
논리는 간단하다. 공화당 충성파 로비스트가 요직을 차지해야 결속력이 높아지고 로비 성공률도 높아진다. 로비 성공률이 높아지면 기업의 로비 수요가 증대한다. 그만큼 선거자금을 많이 거둘 수 있고 자금 우위를 바탕으로 의회 지배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노트 연구원은 공화당의 장기 집권을 위한 구상의 하나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K스트리트의 미래=워싱턴 로비업계에서 톰 딜레이의 보좌관 역임이란 이력서는 성골계급 진입의 보증수표다. 현재 그의 비서실장 공보보좌관 정책자문 출신인 13명의 딜레이 문하생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기업들은 이들을 앞 다퉈 고용해 이익을 챙겨 갔고, 다른 경쟁기업들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공화당 로비인맥에 의존하게 만드는 순환구조가 구축됐다. 그 결과 공화당계 로비스트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쏠림 현상이 감지된다고 공공투명성센터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1994년 시작된 K프로젝트가 빛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로비 스캔들로 딜레이 의원의 정치생명이 위태로워지면서 공화당의 K프로젝트도 중대 고비를 맞았다는 시각이 없진 않지만, 의회-K스트리트-이익집단을 잇는 공생구도는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분석이 더 많다.
김승련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