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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길용 기자

Posted December. 27, 200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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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따냈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첫 소식을 전했다. 감격, 또 감격. 오직 흥분의 바다. 고대 희랍에선 마라톤 승자를 맞아들이는 데 성벽을 허물고 문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헐린 성일망정 새 힘과 새 마음으로 우리 용사를 맞아들이리라. 새 힘과 새 마음은 항일() 의지의 표현이었다. 동아일보는 25일자에 손 선수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었다. 체육부 이길용 기자와 조사부에서 일하던 청전 이상범 화백을 비롯한 10명이 구속됐고 동아일보는 1년 가까이 정간됐다.

이길용 기자는 일본 수사관들에게 동아일보는 조선 민중을 대상으로 창간된 신문으로, 일장기가 담긴 사진을 싣는 것은 조선 민중들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다는 동아일보 내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일장기를 말소했다고 진술했다. 총독부 비밀문서도 동아일보는 평소 민족의식을 선동하는 태도를 갖고 있고, 기회 있을 때마다 비(일본)국민적 행동으로 나올 잠재의식이 있는 것이 명백해졌다고 적고 있다.

일제강점기 최대의 필화사건인 일장기 말소 사건에 대한 일각의 왜곡과 폄훼가 끊이지 않았다. 이길용 기자의 개인의 행위이지 동아일보의 항일투쟁으로 볼 수 없다거나, 동아일보에 앞서 다른 신문이 먼저 일장기를 지워 내보냈다는 식이다. 최근 발견된 이길용 기자의 회고록은 이런 주장을 잠재울 만하다. 이 글은 1948년 모던출판사가 발행한 신문기자 수첩에 실려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동아일보에서 일장기 말소는 항다반사(늘 하는 일)였다고 술회했다. 무슨 건물 낙성식이니, 무슨 공사 준공식의 사진에는 반드시 일장기가 정면에 있는데 이것을 지우고 싣기는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손기정 사진 말고도 일장기 말소가 많았다는 것으로 동아일보의 반일 분위기와 민족의식을 전해 주는 증언이다. 마침 어제는 그를 기리는 제17회 이길용 체육기자상 시상식이 있었다.

홍 찬 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