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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속을 그는 늘 먼저 들어갔다

Posted November. 16, 2006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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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의 딸(32)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한순간도 아빠가 자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아빠, 너무 위험한 데는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간곡히 말씀드리면 제 손을 꼭 잡고 생명을 구할 1%의 가능성이 있으면 희망을 버릴 수 없단다라고 말씀하셨죠.

부산 금정구 남산동 침례병원 77호 영안실. 정년퇴임(12월 31일)을 불과 한 달여 앞둔 노()소방관은 아무 말이 없었다.

14일 오후 금정구 서2동 주택가 가스폭발 사고현장에 매몰된 부산 금정소방서 서동소방파출소 소속 서병길(57) 소방장이 가족과 주변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숨진 채 발견됐다.

1%의 희망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소명의식을 실천하다가 현장에서 산화한 것.

소방파출소에 긴급출동 명령이 떨어진 시간은 14일 오후 7시 52분. 서 소방장은 동료 2명과 함께 3km 떨어진 사고 현장에 3분 만에 도착했다.

서 소방장은 평소처럼 신속하게 그러나 침착하게 건물 일부가 무너진 주택 안으로 동료와 함께 들어갔다. 1층 주방에서 전신에 화상을 입고 신음 중이던 김모(57) 씨와 2층의 황모(78여) 씨를 5분 만에 구출해 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은 벽체가 2층 건물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우지직 하면서 곧 무너질 기미를 보였다. 그 순간 주변에서 안에 세 명이 더 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이 주택에는 네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동료들을 내보낸 뒤 1층 구석구석을 뒤졌다. 누군가 그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매캐한 연기 속을 헤매던 순간 2층 주택이 우르릉, 꽝! 하면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때가 오후 8시 7분. 서 소방장, 서 소방장 하고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단독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라 소방차와 굴착기 등 중장비 진입이 쉽지 않은 데다 건물 잔해를 하나하나 들어 올려야 하는 붕괴 현장이어서 구조가 늦어졌다.

발을 구르던 동료 소방관의 한 가닥 기대에도 불구하고 매몰 4시간 반 만인 15일 0시 40분경 서 소방장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의 탈출을 가로막은 육중한 콘크리트 블록이 엎드린 채 숨져 있는 그의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그가 혹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던 매몰자는 한 명도 없었다.

구조 현장에 달려 나와 다른 사람의 목숨은 건져 주면서 왜 정작 자신의 목숨은 돌보지 않으셨습니까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아들(28)의 애끊는 울부짖음도 허사였다. 굳이 현장에 나가지 않아도 될 위치에 있었지만 누구보다 먼저 출동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바친 노소방관의 희생정신에 후배 소방관들은 고개를 숙였다.

1973년 8월 소방관으로 첫발을 내디딘 서 소방장은 언제나 화재사고 현장의 가운데에 있었다.

서면 대아호텔 화재 때도 그랬고 토성상가시장, 국제시장 화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방관 생활 동안 1만9500여 회 화재 현장에 출동해 1050여 명의 인명을 구조했다. 마지막 순간 두 생명을 더 구하면서 그가 목숨을 구한 사람은 1052명. 박봉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1980년 정든 직장을 떠났다가 1990년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에게서 이런 성실성에다 남을 위해 일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아들과 딸 역시 봉사하는 직업을 선택해 장애인특수학교 교사와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동료 소방관들은 그를 진정한 소방관이었다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부산시소방본부는 서 소방장에 대해 1계급 특진과 옥조근정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장례는 금정소방서장으로 17일 오전 10시에 엄수되며 유해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다. 051-583-8914

한편 경찰 조사 결과 이 주택의 붕괴 원인이 서 소방장이 구조해 낸 세입자 김모(57) 씨가 신병을 비관하며 술을 마신 후 가정용 LP가스를 폭발시킨 것으로 밝혀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조용휘 silen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