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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난학

Posted February. 10, 20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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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맥주), 가라스(유리창), 고무, 가방, 핀세토(핀셋).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 일본말들은 네덜란드에서 건너간 단어들이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미개한 일본을 찾았을 때, 왜소한 체구의 한 일본 관리가 I talk Dutch(나는 네덜란드 말을 한다)고 해 페리 일행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 정도로 네덜란드는 근세 일본의 창()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어로 바꿔 화란()이라고 불렀다.

일본도 조선처럼 오랫동안 쇄국을 고집했다. 하지만 숨구멍 하나는 열어뒀다.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조그만 인공섬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페리 제독에게 굴복하기 전까지 무려 200년 동안 네덜란드인들에게 이 섬에 거주하며 일본과 무역을 하도록 허락했다. 기독교만 빼고 세계지리와 의학서적에서부터 대포, 망원경까지 서양의 많은 문물이 이 경로로 일본에 들어갔다. 난학() 즉 화란어로 된 학문의 전성시대였다.

메이지시대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일본의 벤자민 프랭클린이라고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도 처음엔 난학 신봉자였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서양 상인들이 화란어가 아니라 영어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영학()으로 옮아간다. 이어 게이오대학을 설립하고,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구미 열강의 일원이 돼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을 주창한다. 탈아입구는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미국 워싱턴은 15일에 있을 네덜란드 출신 일본군 위안부 얀 뤼프 오헤르너(84) 할머니의 의회 청문회 증언을 앞두고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위안부 하면 조선인이나 대만인을 떠올리지만, 오헤르너 할머니처럼 태평양전쟁 당시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자바섬에서 살다가 끌려가 위안부가 된 네덜란드 여성도 100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난학으로 눈을 떠 탈아입구를 외치며 전쟁까지 일으켰던 일본인들이 오헤르너 할머니의 증언을 듣게 되면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자.

김 창 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