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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 (상)

Posted July. 18, 20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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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근현대 150년에 관해서 10개의 테마를 뽑아 교류와 연쇄라는 시점에서 다시 파악해 보고자 한다. 우선, 첫 번째가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이다. 이 지역 최대 국가였던 청나라가 영국에 패하여 나라의 일부를 빼앗겼다. 이 사실은 일본과 조선에 어떻게 전해 졌으며 어떻게 받아들여 졌는가.

아편 전쟁 각국에 어떻게 전해졌는가

아편 전쟁은 지금도 살아 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은 중국의 심양과 대련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는 일본인 3명일지도 모른다.

3명 모두 일본으로 마약을 운반하려다가 잡혀 사형 판결을 받고 공소 중이다. 중국인이라면 사형 확정은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사법 당국은 외국인이므로 신중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하지만, 관계자는 마약 범죄는 아편전쟁의 역사가 있는 중국에서는 민감한 사안이다. 안이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아편 밀수를 중지시키려고 한 중국(청나라)에 대해 영국은 세계 최강의 함대를 보내 2년여에 걸친 전쟁을 펼쳤다. 그 아편전쟁의 현장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전쟁의 발단이 된 광동성을 찾아 보았다. 둥관() 시내에만 린쩌쉬() 기념관, 아편 전쟁 박물관, 해전 박물관등 관련 박물관이 3곳이나 있었다. 격전을 벌인 포대의 흔적뿐만 아니라 린쩌쉬가 영국 상인들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처분한 인공 연못도 재현되어 있었다.

6월 26일은 유엔에서 정한 국제 마약 남용 박멸의 날이다. 마약을 태우는 의식을 하거나 아파트 단지를 돌며, 마약 박멸에 대한 강연회를 한다고 이야기한 순광핑(広)부장은 그 준비에 바쁜 것 같았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아편전쟁을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홍콩을 빼앗겼고 이를 계기로 식민지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위기감이 깊어져 갔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북경 대학의 왕샤오치우(暁) 교수에게 물었더니, 청조의 황제는 영토를 잃었지만 지위는 지켰다고 생각하여, 연회도 그만두지 않았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아편 전쟁으로부터 20년이 지나도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은채, 무의미하게 보냈습니다라는 뜻밖의 대답이 되돌아 왔다.

베이징에 있는 황제에게 전장은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남쪽이었다. 황궁에서 가까운 텐진이 공격을 받았다면 시급히 린쩌쉬를 해임했겠지만, 전쟁 후에 황제가 난징 조약을 만년 화약()이라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열강의 침략이 계속되리라는 위기감은 별로 없었다.

구미의 책을 번역하여 정보를 수집한 린쩌쉬

그래도 어떻게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특히, 린쩌쉬는 필사적으로 구미의 정보를 모았던 것 같다. 세계 지리와 역사책을 번역하였고, 실각된 후에는 친한 친구인 웨이유완()에게 이 작업을 맡겼다.

이를 기초로 웨이유완은 해국도지(国図)라는 책을 썼다. 초판은 아편전쟁이 끝난 직후에 완성되었고, 1852년에는 10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가 되었다. 각국의 정세 이외에도 서양의 배나 대포 등을 도해를 붙여 해설하였으며, 서양의 장점을 배워, 서양의 침략을 제압한다는 전략을 펼쳤다.

왕교수는 일본에 연구차 방문했을 때, 해국도지를 번역한 책의 종류가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흑선을 타고 온 미국의 페리가 일본에 개국을 요구한 것이 1853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 해부터 불과 3년만에 나온 번역서만 해도 21종류에 달한다. 미국에 관해 범위를 좁힌 것만해도 8 종류가 있다.

네델란드로부터 청의 고전(戦)을 알게 된 일본

린쩌쉬의 유산은 본국에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일본에서 꽃피웠던 것이다. 사쿠마 쇼잔(), 요시다 쇼인(), 사이고 다카모리(郷) 등 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동향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은 거의가 해국도지의 열렬한 독자였다.

홋카이도 대학()의 이노우에 가즈오()교수는 이를 지()의 정보 루트라고 표현한다. 중국은 실로 훌륭한 책을 만들었다. 그 번역 덕분에 일본은 아편전쟁 후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그 후 메이지유신 정부도 만국 공법(국제법) 등을 읽고 외교에 유용하게 이용했다고 말했다.

아편전쟁의 속보는 또 다른 정보 루트를 통해서도 들어 왔다. 나가사키()에 입항하는 네덜란드의 배가 전해 준 정보였다.

네덜란드는 개전 직후,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청나라의 고전 상황을 전했다. 그 후, 영국이 청을 점령한 것과 많은 청나라 병사가 죽었다는 소식 등을 중국의 배가 일본에 알려 주었다.

당사자인 중국으로부터 생생한 정보가 전달되었고, 네덜란드로부터는 서양 측에 관한 정보가 전해져 왔다. 오보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러한 여러 정보에 의해 일본은 거의 정확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충격를 받은 에도 막부의 노중( 지금의 수상) 미즈노 다다쿠니()는 천보()의 개혁에 힘을 쏟았다. 서양 식으로 포격 연습을 하는 한편, 외국 배가 근접해 오면 발포하도록 명했던 것을 중지하고 연료나 물을 주도록 했다.

미즈노는 에도와 오사카 주변을 직할지로 삼으려고 했다가 실각했지만, 그 후에도 막부는 정보 수집에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페리의 내항만 하더라도 네덜란드의 통지를 통해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청이 패배한 아편전쟁을 교훈으로 삼아 전쟁 회피를 방침으로 삼았다.

막부는 속수무책이 아니라, 국력에 상응하는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이노우에 교수는 말한다. 즉, 미국으로부터 일방적인 불평등 조약을 강요받았다는 정설에 수정을 가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왕 교수와 이노우에 교수가 함께 주목하는 인물이 있다. 페리와 동행하여, 일본 측과의 교섭에 한문으로 통역을 담당한 르오 센()이라는 중국인이다.

르오 센은 막부의 관리들과 친해져 질문을 받는 대로 중국의 실정을 알려 주었다. 막부 측의 히라야마 겐지로(郎)가 이웃을 사랑하고 모두가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는 편지를 띄운 것에 대해, 르오 센은 아편 전쟁에서 싸운 자신의 경험을 답장으로 보냈다.

자기 이속을 채우는데 바빴던 정부 관리들은 나의 공헌이나 노력을 알면서 한 번도 고려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내 마음은 외국 여행으로 기울었고, 이 증기선을 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그 몇년 후에는, 중국으로 가는 일본인도 증가했다. 아편전쟁으로 개항된 상하이는 국제 도시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일본에게는 세계를 보는 창이 되었던 것이다.

조슈번( 현재의 야마구치현(県))의 다카스기 신사쿠()는 1862년, 막부 사절의 수행원으로 상하이에 가서 농민들이 궐기한 태평천국군의 총성을 듣는다. 오만한 태도의 영국인과 프랑스인, 주눅 든 것 같은 중국인. 그는 일본이 이렇게 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을 뼈져리게 느꼈다.

귀국 후, 다카스기는 하급 무사와 농민을 모아 지금까지의 무사 군단과는 다른 기병대()를 조직하여 막부 타도 전쟁을 선도했다.

조슈와 손을 잡고 막부를 쓰러 뜨리게 되는 사쓰마번 ( 현재의 가고시마현(児県))에는 특별한 정보 루트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 양쪽에 속하면서 쌍방에 사절을 보내고 있던 류큐왕국(国 현재의 오키나와현(縄県))으로부터의 정보였다.

중국 남부의 푸저우()에 가면, 류큐로부터 온 사절과 상인의 숙박 시설을 박물관으로 만든 푸저우 류큐관이 있다. 아편전쟁 무렵의 연호가 새겨진 류큐인의 무덤도 남아 있다. 그곳은 린쩌쉬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여기서 직접 들어 오는 정보는 귀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편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와 영국의 군함이 차례로 나하()로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열강의 힘을 알고 있던 사쓰마는 재빨리 개국론으로 돌아섰고, 이윽고 막부 타도에 나섰던 것이다.

청조와 가까운 조선, 낙관하여 행동하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조선에는 아편전쟁의 정보가 어떻게 전해 졌으며, 어떠한 변화를 가져 왔을까.

서울의 숭실대 하정식()교수에게 들어보았다.

조선은 일본과 달리 청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었고, 화이질서(, 키워드 참조)의 범주 안에 있었다. 매년 적어도 1번은 베이징에 사절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직접 눈으로 중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보다 정확한 정보가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 교수는 이렇게 지적하면서,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정보 수집이 너무나도 청나라 위주였다. 종주국의 체제가 어떻게 될지가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넓다. 베이징은 아편전쟁의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결점도 있었다.

하 교수는 청이 영토를 잃지 않았다고 오해했던 것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부는 해안 방비에 대한 논의를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조선은 소수의 권력 집단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고 말했다.

다만, 제2차 아편전쟁(1856-60년)으로 베이징이 함락되었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조선 왕조도 당황했던 것 같지만, 좀처럼 행동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조선은 궁핍해서 구미 제국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므로 공격해 오지 않을 것이라는 등, 낙관하고 있었습니다. 정보 활용이란, 정보 그 자체보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사나 태도의 문제라고 하겠지요 라는 하 교수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편전쟁이 일어났던 것처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동아시아 진출은 일본을 개국시켰으며 그로부터 메이지 유신이라는 대변혁도 시작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동아시아에 과연 무엇을 가져 왔는가.

구마모토 신이치隈 , 후루야 고이치

마약 범죄에 대한 엄벌

중국 정부는 마약 범죄를 엄벌에 처한다. 그 이유는 아편 전쟁의 쓰라린 경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중국 동북부 심양대학(学) 판샤오양(暁) 조교수(법률학)는 어려서부터의 교육을 통해 우리는 아편전쟁으로 중국에 유입된 마약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왜 마약 박멸에 힘을 쓰는지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형법에 의하면, 헤로인 50그램을 밀수, 판매하거나 수송, 제조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 중국 사법 잡지에 실린 1997년의 마약 범죄 판결 통계에 의하면, 헤로인 50그램 이상, 아편 1킬로그램 이상의 마약 범죄로 기소된 피고 가운데 7할 이상이 사형이나 무기 징역 또는 15년 이상의 징역형을 판결 받았다고 한다.

얼마전 중국에서는 40대에서 60대 사이의 일본인 3명이 마약 밀수죄로 체포되어 집행유예 없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중국은 세계에서 마약의 대표적인 생산지로 알려진 미얀마, 타이와 가깝다. 이들 3명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한 마약도 제3국에서 중국으로 들어 온 것이라고 한다.

정부가 엄벌주의를 강행하는 배경에는 마약 유입이 끊이지 않고 있는 사정도 있다. 2006년에 입건된 마약 범죄 사건은 총 4만6천건이며 구속자는 총 5만 6천명에 달한다.

아편 전쟁

1840-42년, 마약인 아편 무역을 둘러 싸고 일어난 중국(청나라)과 영국의 전쟁.

양귀비 열매로 만드는 아편에는 진정작용이 있어서 예전부터 중국에는 파이프로 아편을 피우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풍기 문란 등의 문제로 청나라 조정에서는 빈번히 아편 금지령을 내려 왔다.

한편, 18세기 후반에 산업혁명을 거친 영국에서는 홍차를 마시는 습관이 서민에게 퍼지면서 중국으로부터 대량의 차를 구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무역 적자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영국은 당시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아편을 만들어 중국으로 밀수출함으로써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하였다.

아편 유입으로 인해 중국의 국내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청나라 황제는 1839년 린쩌쉬()를 특명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무역의 거점인 광저우(広)에 파견하였다. 린쩌쉬는 대량의 아편을 몰수해 폐기 처분하고 영국 상인들을 추방하였다.

영국 정부는 이러한 조치에 반발해 전쟁을 결정하였다. 의회에서는 나중에 수상이 된 글래드스톤(Gladstone) 등이 개전에 반대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파병 관련 예산을 승인하였다. 1840년에 영국은 최신예 군함으로 광저우(広)등의 연안부에서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영국군은 베이징에 가까운 텐진 앞바다 등지에서 무력 시위를 감행하였다. 1842년 청나라가 영국에 굴복하여 난징조약을 체결하고, 배상금 지불과 홍콩 할양 및 상하이()와 광저우 등지의 개항을 받아 들였다.

화이질서()

중국 황제를 정점으로 한 계층적인 국제 관계를 가리킨다. 중국에 사는 자신들은 우월한 문명을 가진 세계의 중심(중화)이고, 그 주위에 사는 사람들은 미개한 야만인(오랑캐)이라는 오래된 사상에서 기인한다. 구체적으로는, 중국 황제의 은혜을 받기 위해 조선 등 주변 나라들은 공물을 바쳤으며(조공), 그 대신 중국 황제가 왕으로 인정한다(책봉)는 형태를 취했다.

아편전쟁 당시에 조선, 류큐(), 베트남 등이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중국을 종주국이라고 하였다. 일본은 고대와 무로마치()시대에는 중국과 조공-책봉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아편전쟁 당시에는 이탈해 있었다.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지역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배우고 있는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각각 널리 사용되고 있는 중학생용 교과서를 비교하고,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은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이다.

교과서를 비교하다

동아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 지역의 근현대사를 어떻게 배우고 있는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각각 널리 사용되고 있는 중학생용 교과서를 비교하고,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번은 아편 전쟁과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이다.

일본-아편전쟁 담백한 기술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는 제5장 개국과 근대 일본의 역사에서 아편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그 기술은 담백하다.

아편을 엄격하게 단속한 청나라에 대해, 1840년 영국은 군함을 보내 굴복 시켰습니다(아편 전쟁). 그 결과, 상하이 등의 항구를 개항시키고 홍콩을 수중에 넣은 영국은 영사 재판권을 인정받는 등 청나라에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하였습니다.

교과서의 전체 내용은 일본사를 중심으로, 아편전쟁은 어디까지나 개국 후에 줄곧 근대화를 추진해 온 일본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쓰여져 있다.

1950년대에는 전진하는 유럽과 뒤떨어진 아시아라는 대비로 설명했었지만, 그러한 표현은 없어졌다. 현재의 교과서에서는 대청 무역 적자에 고심하던 영국이 아편의 밀수출을 시작했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다. 도쿄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 편집부장은 아시아가 뒤떨어져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역사학계의 견해가 반영된 결과라고 말했다.

학습지도요령은 메이지 유신에 관해, 복잡한 국제 정세의 와중에 독립을 유지하고 근대 국가를 형성해 나간 정부와 인물들의 노력을 알 수 있도록 한다. 폐번치현(廃県 번의 폐지와 현의 설치), 학제•병제•세제의 개혁, 신분제도 폐지, 영토의 획정을 다룬다고 정하고 있으며, 어느 교과서건 이에 따라 기술하고 있다.

도쿄 서적 판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관해 12쪽을 할애하고 있다. 영토 획정에 대해서는 국경을 획정하는 것은 근대 국가로서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라고 설명한다. 또한 류큐 왕국을 일본에 편입시켜 오키나와현으로 한 류큐 처분(処)에 대해서도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이에 반대하는 류큐 사람들을 억누르고 오키나와현을 설치했습니다(류큐 처분) 라고 기술하고 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沢

중국-중화 민족의 저항을 강조

중국은 아편전쟁을 근현대사의 시작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민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는 아편전쟁에 대해 5쪽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아편전쟁을 다루고 있는 단원의 제목이 침략과 반항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침략뿐만이 아니라 중화 민족이 어떻게 저항했는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린쩌쉬()의 아편 처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편 처분은 중국 인민의 아편 금지 투쟁의 위대한 승리이며, 밖으로부터의 침략에 반대하는 중화민족의 단호한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 투쟁을 지도한 린쩌쉬는 의심할 여지없는 민족의 영웅이다.

메이지 유신은 세계사 교과서(인민교육 출판사의세계 역사)에서 2쪽 남짓한 분량으로 설명되고 있다.

중국의 학습지도요령에 해당하는 역사과정표준 작성에 참여한 주한구오(国) 북경 사범대 교수는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확실히, 일본을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변화시킨 중대한 사건이었다라고 말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다룬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메이지 유신에 의해서, 일본은 쇄국정책을 펴던 봉건 사회로부터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되었다. 반식민지 국가가 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의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힘을 키운 뒤, 곧바로 대외 침략과 확장이라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또한 19세기 말 중국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여, 인재 등용 등의 개혁을 진행하려 한 무술 변법(変)이 일어났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교과서는 왜 메이지 유신은 성공한 반면, 무술 변법은 실패했는가를 조사할 것을 학생들에게 과제로 던지고 있다.

(사토 가즈오

한국-일본의 대륙 침략의 전개 과정을 서술

한국의 국사는 국정인 국사교과서로, 세계사는 사회 교과서로 배운다. 아편 전쟁은 국사가 아닌 세계사라는 위치 설정이다. 그 이유를, 교육인적자원부의 구난희 교육 연구관은 조선에서의 아편 전쟁의 영향은 간접적인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금성출판의 사회 2에서는 동아시아의 근대적 성장 부분에서 아편 전쟁을 취급하고 있지만, 간단히 8줄로 기술하고 있다.

한편,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는 같은 교과서에서 1쪽을 할애하고 있다:

메이지 정부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국왕 중심의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였다. 또한, 신분 제도와 토지 제도, 조세 제도 등을 개혁하고 신식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적극적으로 산업을 진흥하여 자본주의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로써,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 국가로 성장하였다.

기본적으로는 긍정적인 평가이지만, 바로 이어 일본의 대륙 침략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이 열강의 식민지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고 있을 때,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만이 근대 국가로 성장하여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을 거쳐, 마침내 조선의 주권마저 빼앗았다라고, 지도를 덧붙여 대륙 침략의 전개 과정을 싣고 있다. 교과서 집필자는 메이지 유신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으므로, 그것을 사실대로 기술했다라고 설명한다.

국사 교과서에서도,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파에 대해서 메이지 유신을 본떠 근대 국가를 이루고자했다고 유신의 영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

대만-자금성()의 황혼이라며 냉담

주요 3사의 교과서 중 하나인 난이서국()의 국민 중학•사회에서는 아편전쟁에 대해 1페이지밖에 할애하지 않고 있다. 단원의 제목은 자금성의 황혼이다. 자금성이란 청조의 왕궁(현재의 고궁)이며, 황혼이란 청조의 쇠퇴를 의미한다. 제목에서부터 중국과는 표현 방법이 다르며, 어딘가 냉담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 교과서의 편집지도위원인 쬬호이민(恵)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아편전쟁을 포함한 교과서 전체의 작성 방침에 대해, 대만은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국민당 사관이 뚜렷했다. 우리는 국민당 사관을 수정하기 위해 많은 검토를 거듭했다고 설명하였다. 국민당 사관이란 국민당 정권이 중국의 정통 정권이다는 사고가 반영된 견해이다.

국민당 정권하에서 1983년에 제정된 역사 과정 표준에 따라 편집된 교과서에서는 아편전쟁에 대해 4쪽 남짓의 분량을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불평등 조약에 의해 열강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며 침략의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는 아편전쟁의 결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근대 중국이 불평등 조약을 맺는 개막이 되었다. 이 이후 영국 이외의 열강들도 동일한 특권을 획득했다.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는 중학 3년 사회의 세계사 부분에서 1쪽 반이 할애되어 있다.

옛 교과서에서는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업화를 이룩한 나라가 되어 대외 침략을 시작하였고, 우리 나라에 심각한 해를 가져왔다는 기술로 메이지 유신의 부정적 측면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은갑오 전쟁과 러일 전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계속 물리쳐, 세계의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다무라 히로쓰구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 진다-진슌진() 작가

나는 역사작가이다. 어떤 시대를 주제로 삼더라도 항상 근현대사를 의식한다. 그것이 내 작업의 방침이며, 근대 동아시아의 10대 사건에 중국 은나라의 유적인 은허()의 발견을 뽑은 것도 그 때문이다.

맨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역시 아편전쟁이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청나라 왕조는 육지, 즉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해야 한다는 새방파()와 바다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는 해방파()로 나뉘어 있었다. 린쩌쉬()는 새방파의 인물로, 아편의 유입도 무역 문제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였으며, 청은 류큐왕국에서도 유학생을 받고 있었다. 그 중에는 사쓰마() 출신자도 섞여 있었다. 메이지유신 당시 사쓰마 번이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여러 가지 정보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일본도 가까운 장래에 개국을 강요당할 것이라는 점을 감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을 접하면서 이를 절감했다.

다음은 청일전쟁이다. 당시 양 국민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메이지시대는 한시의 융성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중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전쟁이 일어났던 것일까? 당시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러일전쟁도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간의 싸움이었다. 한국병합(주)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첫걸음이었으며, 이미 중국 동북부에 대한 침략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러한 제국주의의 모델이 얼마든지 있었고, 사람들도 지지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러일전쟁 후의 강화조약에서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일본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한국병합은 중국의 지식인이나 민중을 자극하였고 신해 혁명으로 이어졌다. 청의 낡은 체제는 무너져 내렸다. 제1차 대전 후, 일본의 이권 확대에 항의한 5•4운동의 배경에는 신해혁명 때부터 고양된 민중들의 국익 의식과 국익 상실에 대한 강한 불만이 근저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 전쟁. 만주사변에서 패전까지의 과정은, 한국병합으로부터 이어져 온 하나의 흐름으로서, 15년 전쟁이라는 한 묶음으로 인식해야 한다.

전후의 사건으로는 우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들고 싶다.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게 진 원인은 부패였다. 또한 대만에서 국민당이 대만인을 학살했던 1947년의 2•28 사건은 국민당이 공산당에게 형세를 역전당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패전 다음 해, 나는 대만으로 돌아와 중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대륙에서 온 무리들이 민중들에게 물자를 접수하는 모습에 실망했다. 민중도 분노하였고, 암시장에서 담배를 적발하는 경찰들은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자 정부는 바로 보복 조치를 단행하여 수 만명의 국민당 정예를 투입해서 민중을 탄압하였다. 대만의 지식인들은 좌경화되었고, 나도 1949년에 일본으로 돌아 왔지만 그 직전에 그들과 접촉하여 신변이 위험했다.

그 다음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전쟁, 중국에서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 정책이다. 지금의 중국은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이 구축한 노선에 따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처음에 언급한 20세기 초의 은허() 발견의 의의를 말하고 싶다. 우리는 은나라의 주왕을 포학무도한 인물로, 그 이상의 악인은 없다고 역사책에서 배워 왔다. 그러나 발굴된 갑골 조각을 연구해 보면, 그의 선대는 인간을 죽여서 제사의 희생물로 삼았지만 주왕 시대에는 그만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인은 커녕, 오히려 선인다운 행동이다. 역사책은 후세의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 역사를 볼 때,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인터뷰 : 나카노 아키라

주: 한국에서는 일본에 의한 강제적 점령(강점, 일제강점)이라고 합니다만, 화자의 발언 그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진슌진() 작가의 약력

1924년 고베시(戸) 출생, 대만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사카() 외국어학교(현, 오사카 외대) 졸업. 중국 근대의 군상, 실록 아편 전쟁 등, 근현대사에 관한 저서도 많다.

진슌진 작가의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아편 전쟁

청일•러일 전쟁

한국 병합

신해 혁명과 5•4운동

일본의 15년 전쟁만주 사변부터 패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한국 전쟁

중국의 문화 대혁명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이상, 시대순

은허( 은나라 왕조 옛 건축의 유적) 발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