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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청일전쟁과 대만 할양(상)

Posted August. 28, 200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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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되었다

아편 전쟁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의 잇따른 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기감을 느낀 메이지() 시기의 일본은 근대화를 서둘렀다. 제 2장은 이러한 일본이 스스로 아시아를 침식하고, 열강으로 변모하게 된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을 주제로 한다. 일본인은 잊어버리기 쉽지만, 이 전쟁은 한반도()를 무대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청나라 군만이 아니라 조선 민중도 적으로 돌렸다.

이쪽에서 먼저 화제로 삼은 일도 있고, 상대편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은 같은 말이었다.

어째서이지요.

청일 전쟁의 흔적을 찾아, 나는 한국과 중국을 돌아 다녔다. 거기에서 만난 정치가와 학자가 고개를 갸우뚱 했던 것은, 청일 전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가 하원 위원회에서 막 가결되었다.

아베 신조() 수상이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광의인가 협의인가로 나눈 점,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에게 '사죄의 뜻을 표한 것, 여, 야당 국회의원을 포함한 사람들이 미국 신문에 반론 광고를 낸 것. 특히 광고에 관해서는 상식을 넘어 섰다라고 한국의 강창일() 의원은 말했다. 울분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에 가깝다.

단지, 이러한 일본의 행동이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좋게 비춰 질 리가 만무하다. 강 의원은 원래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 대한 저작도 가지고 있는 학자 출신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은 아직도 100년의 불신 속에 있다고 말한다. 정확하게는 종결된 지 112년이 지난 청일 전쟁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일본과 중국이 정면충돌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청일 전쟁은 한국인들에 있어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먼저, 전장은 한반도()였다.

청일 전쟁

189495년, 중국(당시 청나라)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일본 측은 1만3000여명의 전사자 및 병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전쟁 비용은 약 18억 원이었다. 중국 측은 미상이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왜 조선의 지배권에 집착하였는가? 그것은 1890년, 제1회 제국 의회에서 행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의 시정 방침 연설에서 알 수 있다. 야마가타()는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경이라는 주권선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협할 수 있는 이익선까지 수비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 이익선이 조선이었다. 배경으로는 시베리아 철도 착공을 목전에 둔 러시아가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6년의 한일 수호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기치로 내걸어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게 하려는 한편, 시장으로서도 중요한 조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였다. 조선 내부에서도 청•일과 연결된 각각의 세력이 다툼을 벌였으며, 1884년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은 김옥균 등이 일으킨 쿠데타를 청나라 군이 진압하였다. 조선을 사이에 둔 줄다리기는, 청일 전쟁이라는 정면충돌에 이르게 된다.

조선 왕궁을 점령 / 청나라 군 축출 작전

한류는 이미 붐이 아니라, 지금은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가 일본에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주말에 서울로 여행가는 것도 보통이 되었다.

그 서울에 경복궁이라는 왕궁이 있다. 관광 명소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전쟁은, 사실상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7월 23일 미명. 어둠속에서, 한 무리의 일본군이 경복궁의 문 하나를 폭약으로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나 잘 되지 않자, 기어오르고, 도끼로 부수는 등, 갖은 방법 끝에 난입에 성공하였다. 다른 문도 활짝 열고 왕궁을 지키는 조선 병들과의 약 3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왕궁을 제압한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마치 활극 영화와 같았던 전투였는데, 일본군의 공식 전사에는 기록이 없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소소한 전투였다고 간주되어 왔지만, 후쿠시마() 현립 도서관에서 상세한 전사 초안을 찾아내어, 100년 후의 세상에 진상을 알리고자 한 사람이 나라() 여자대학의 나카쓰카 아키라() 명예교수였다.

왜 왕궁을 점령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위정자를 바꾸어, 일본에게 청나라 군을 조선에서 축출해 달라는 요청을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도 난폭한 수법이라고 지금은 생각되지만, 당시는 그런 난폭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일본은 더욱 난폭해 져서 1945년 파국에 이르게 되지만. 우선은 이 전쟁이다.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와 일본, 쌍방의 군대가 있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봄, 조선 남부에서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 중심의 동학(키워드 참조)교도 들이 봉기한 일이다. 온갖 착취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회 개혁 운동이었다. 현재는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 불린다. 대처 능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종주국인 청나라에 출병을 부탁했는데, 그 와중에 일본도 멋대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동학 농민군은 청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보고 조선 정부와 원만한 협상을 벌여, 일단은 소동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군 의사가 없었다.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일본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2일 후 인천 근처의 풍도() 연안에서 청나라와의 교전에 돌입했다. 일본은 어찌하였던 간에 개전의 구실이 필요했다. 정부 내에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주도한 것은 외무장관 무쓰 무네미쓰()이었다.

왕궁 점령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은 전장으로 변했다. 일본군은 청나라 군과 싸우면서 쾌조의 진격을 하는 한편, 동학 농민군을 섬멸시켜 버린다. 왕궁 점령을 계기로, 농민군은 타도 상대를 부패한 조선 정부에서 일본 침략군으로 변경하고, 재봉기 하기에 이르렀다.

민중 봉기의 효시 / 동학 농민 혁명

서울에서 고속철도로 3시간을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학 농민군의 발상지인 전라도에 이른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 광주 민주화 운동(키워드 참조)의 기념 묘지에 들렀다. 여기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부다라고 쓰여 있었다. 상영되고 있는 비디오에는 동학 농민군의 싸움도 소개되어,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진 민중 투쟁의 효시라고 찬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동학당의 난으로 오랫동안 불려 왔지만, 동학 농민군 투쟁은 한국에서는 난 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역적으로 간주하여 왔지만, 100년의 세월을 거치고야 재평가가 진행되었다. 포괄적으로 역사의 재검토를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 하에서, 2004년에는 명예 회복 특별 입법까지 제정되었다. 지금은 동학 농민 혁명이라 부르며, 그 기념관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처음에는 조선의 신분 사회에 이의를 주장하였고, 다음에는 군화발로 짓밟으며 들어오는 일본을 밀어 내고자, 농민군은 싸웠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 하에 있었던 지역에서는, 오늘날의 지방 자치의 원형과 같은 체제를 유지한 것을 보면, 확실히 민주화의 선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기념관의 이영일()연구원에게 물었더니, 농민군의 주된 무기는 죽창으로써 화승총을 겨우 면한 정도의 것을 지고 있으면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6연발총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은, 병사 1인당 농민군 100명과 필적했다. 농민군 측의 희생자는 만 명이라고도 5만 명이라고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10배에 달한다는 설도 유력하다는 말을 복수의 전문가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판명 되지 않고 있다. 명예회복에 즈음하여, 그 자손에 대한 조사도 정부 주도로 2009년까지 계속된다.

광주 민주화 운동

한국에서 1980년5월,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씨 등의 신 군부가, 계엄령 하에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씨 (후에 대통령) 등을 체포했다. 이를 계기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학생과 시민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한국군은 전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을 해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 정부는 사망자 193명으로 발표하였다.

동학

1860년에 최제우=사진=가 창시했다. 한국의 원광 대학교에서 동학을 강의하는 박맹수() 교수는 신분 제도가 남아 있는 당시의 조선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귀중하다는 주장에, 차별을 받고 있던 농민들이 반응했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이 일으킨 갑오농민전쟁은 악정을 바로 잡는 것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척외척양을 외쳤다.

화이질서의 붕괴 / 그 숨통을 끊다

외적 배제를 주창한 동학 농민군이지만, 청나라 군과는 싸운 흔적이 없다. 왜 그들은 일본군만을 눈앞의 적으로 삼은 것일까?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이며,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과 같았다. 조선은 청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받치고, 청나라는 답례로 선정을 베풀도록 하시오라며 조선의 왕임을 인정해 준다. 조공 체제라고 하는 것으로, 상전•부하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부하라고 할지라도 독립국인 것이다.

중국 다이렌()에서 만난 랴오닝() 사범대학 역사학부의 꾸어티에춘() 부교수는 조공 체제는 지배와 착취의 관계가 아닙니다. 속국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 가지 결점은 있었다 할지라도, 속국 쪽에도 그리 거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국을 상전으로 섬겼던 것은 조선뿐만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동아시아의 부근 일대가 그러했다. 베트남과 일본의 류큐(), 모두가 중화 세계의 주민이었고, 원래 중국이라는 것은 현재의 국제법 체제에서 말하는 국명이 아니었다. 그 경계는 지금까지도 애매한 것으로, 엷은 먹물로 쓴 것 같이 어렴풋한 것이었다.

화이질서라고 불리는 이 국제관계는 서구 열강이 끼어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숨통을 끊은 것은 청일 전쟁이었다.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고, 내가 인정해 줄 테니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잘 해 봐라며 떡 버티고 있는 것이 중국이라면, 일본은 여기까지는 내 것이다, 이 안에서는 내 맘대로 하겠다라며 제국주의의 선 긋기 전쟁에 참여했고, 거기서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청나라도 단지 느긋한 종주국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조선만 해도 현상 유지인가, 변혁인가를 두고 내부 싸움게다가 아주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화이질서로부터 떼어 버리기 위해, 이것은 문명인가, 야만인가의 싸움이라고 호소하며 내외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도, 19세기 말의 세계에 있어서는 완전한 억지 이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를 들면 일본이 침공한 중국의 웨이하이() 연안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 무렵의 동아시아가 갖고 있었을 느슨한 일체감을 버리기 어려운 생각도 든다. 청일 전쟁으로 아시아 침략의 발을 내디딘 일본은, 그 후에도 머릿속에서 아시아는 외부에 두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시립대학을 방문했을 때, 정재정() 교수는 주변국의 위협을 강조하여 국내를 한데 모은 것이 일본이라며, 청일 전쟁 이후에 일본을 돌이켜 보았다.

아시아인에게 공감을 주는 슬로건, 즉 아시아의 공통된 가치관. 그것을 일본은 결국 제시 못 하였다

100년의 불신.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일본 비판은, 원한보다는 답답함에서 나오는 탄식에 가까운 것으로 나에게는 들렸다.

(후쿠다 히로키())

그 당시 세계는?

청일 전쟁이 일어난 19세기 말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석권하던 시대였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제품을 팔 시장과 원재료의 공급처가 필요했던 열강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였다.

청일 전쟁보다 조금 빠른 1880년대에는, 아프리카 대륙이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었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횡단 정책을 펴는 프랑스가 수단에서 충돌하였고, 영국이 금과 다이아몬드 광맥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보아)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열강은 아시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프랑스는 1884년에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청의 속국이었던 베트남의 보호권을 얻었으며, 3년 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성립시켰다.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아 진출을 놓고 서로 견제하였으며, 청일 전쟁으로 새롭게 열강의 일원이 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국은 이 시기, 아시아에서는 유럽 각 국에 비해 희미한 존재였지만, 1893년에 하와이의 왕정을 폐지시키고, 5년 후인 1898년에는 병합해 버린다. 같은 해에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을 획득하였다. 카리브해 제국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억지로 자신의 세력 하에 두어,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은 곤봉 외교라 불리었다.

이 시기의 동아시아

1840 아편 전쟁

1867 일본에서 막번() 체제가 끝나고, 새 정부가 성립

1871 일청 수호 조약. 서로 대등한 내용

1873 일본 메이지()6년의 정변으로 정한론 패배

1874 일본 대만으로 출병

1875 강화도() 사건. 다음해, 한일 수호 조약으로 조선 개국

1882 조선에서 임오 군란.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짐

1884 청•불전쟁.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1884 조선에서 갑신 정변 일어남. 일본 군과 청나라 군이 충돌

1885 일본과 청나라가 텐진() 조약. 갑신 정변으로 인한 조선으로의 파병 시는 서로 통지하기로 정함.

1894 조선의 갑오 농민 전쟁을 계기로 청일 전쟁 발발

1895 조선 황후인 명성황후, 일본인에게 살해 당함

시모노세키() 조약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계속 청나라에게 승리를 거두며, 1895년4월에는 일본 측이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청나라 측은 리훙장() 등이 전권 대표로 시모노세키()에서 강화 조약을 맺는다.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 요동 반도 및 타이완을 할양한다 배상금 2억 량(약23억 원)을 지불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러•독•불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이 때의 와신상담이 러일 전쟁으로 이어진다.

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근대 일본과 중국의 최초 전쟁은 한반도가 무대가 되어 대만의 운명을 크게 바꾸었다. 각국의 중학교용 교과서에서는 이 전쟁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일본, 일본 측의 논리를 설명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 청일 전쟁은 2페이지에 걸쳐 기술되어 있으나, 바로 앞 구미 열강의 침략과 조약 개정의 항에서, 자세하게 청일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는 일련의 과정을 제국주의라 설명하는 한편,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한일 수교 조약을 맺은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 다툼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중략) 1884년에 일어난 정변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일본은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조선으로의 진출이 막히면 일본의 앞날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 증강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갔습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은 구미 열강에 대한 위기감에서 기인한다는 설명이다. 도쿄() 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 사회 편집부장은 일본의 정책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은 있었지만, 청일 전쟁부터는 러일 전쟁, 조선 침략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을 달렸다. 이 과정을 말하기 전에 일본 측의 논리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청일 전쟁의 항목에서는 개전의 계기가 된 농민 봉기에 5줄을 할애하는 한편, 청일 전쟁에 관한 기술은 전쟁은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이 승리하였고,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이 맺어졌습니다라고 짤막하다. 계속해서, 조약의 내용이나, 열강이 청나라에서 세력 확대 경쟁을 한 것, 일본에서는 삼국 간섭을 받아 러시아에 대한 대항심이 높아졌다고 쓰여 있다.

대만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2줄밖에 쓰지 않았다. 다음과 같다.

대만을 영유한 일본은 대만 총독부를 설치하고, 주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지배를 밀고 나갔습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중국, 침략 전쟁으로 평가

중국의 인민교육출판사 판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은 침략과 반항이라는 단원에서 4페이지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와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은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는 점이다. 첫머리 3줄에 이렇게 쓰여 있다.

1894년에 일본은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을 침략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겠다는 몽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수도 한성으로 출병하여 점령하고, 이어서 중국 침략 전쟁을 발동했다.

이러한 위치 부여는 중국에서 2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베이징 사범대 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오 전쟁은 일본이 중국에 대하여 발동한 최초의 대규모 침략 전쟁이다, 1894년7월, 일본은 선전 포고도 하지 않고 전부터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대중국 전쟁을 발동했다라며, 일본 측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온 전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두 교과서 모두 청나라 해군 함장인 덩스창()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탄약이 다 떨어지자, 우리가 희생이 된다 할지라도, 국가의 명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라며 일본 군함에 돌진하여 장렬한 전사를 한 사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쟁 묘사가 간결한 일본 교과서와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는 중국의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역사 과정 표준에서, 학습 목표로서 덩스창의 주요한 업적을 기술하여, 중국 인민의 외국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적 기개와 투쟁 정신을 실감한다라는 기술에 기인한다.

대만 할양에 대해서는, 대만 사람들이 진주해 온 일본군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입힌 것을 반 페이지 정도로 기록하며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대만의 전 국토가 상실되었다. 그러나 대만의 여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며, 조국 복귀를 쟁취하려는 투쟁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사토 가즈오())

한국, 항일 농민 운동에 초점

한국은 이 전쟁을 청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세계사를 취급하는 금성 출판사의 사회2는 일본의 대륙 침략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강화도() 조약으로, 한반도에 침략의 발을 내디딘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으로부터 요동(랴우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세계사 부분에서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국정 국사(자국사) 교과서에 나온다. 청일 전쟁은 1894년에 시작된 동학 농민 운동과 뒤에 이어지는 내정 개혁의 항목에 등장한다. 어디까지나 전쟁이 아니고, 농민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농민들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도 우리나라에 군대를 보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기술은 7페이지에 달하며, 일본과 청에 의한 내정 간섭, 농민 생활의 곤궁, 정부의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봉기한 농민의 전투 상황 등과 운동의 의의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쟁 자체보다도 전쟁의 계기와, 일본군과 싸운 조선 농민군의 역사를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강화 조약에 대해서도 취급하지 않았다.

전주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궁궐을 침범하였으며,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일본군의 침략 행위가 노골화 되자,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섰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구선희(姫) 사료조사실장은 수탈만을 당했던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여 정부에 항의하고, 개혁을 요구한 운동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라고 설명한다. 동학 농민군이 후에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에 참전하여 항일 투쟁의 전통을 이었다 (국사 교과서)라는 점도, 중요시하는 하나의 이유다.

(사쿠라이 이즈미())

대만, 식민지의 공죄()를 상세하게

대만에서는 국민 중학•사회(남일 서국())의 중국사 부분 청말 개혁의 좌절에서, 전쟁에 대해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전쟁 국면은 지도로 표시하고, 기술은 20수년 전의 교과서와 비교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으며, 패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갑오 전쟁의 실패는 총포와 군대 장비 수준의 개혁만으로는, 스스로를 강하게 하기에는 모자랐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편, 전쟁으로 초래된 대만의 일본 할양은, 중학교 1학년 대만사 부분에서 공부한다. 50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를 16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대만의 지방장관 등이 주도했던 대만 민주국 건국과 선주민의 봉기 등, 일본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하여, 경제 발전과 사회 제도의 정비에서 황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의 공죄()를 기술하고 있다. 그 중, 할양 당시에 대한 기술은 이러하다.

대만의 명사와 평민은 탕칭숭()과 치우펑짜() 등을 옹립하여 대만 민주국을 만들고, 외부에 지원을 요청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살아서 잡히는 것 보다, 죽어서 의민이 되겠다대만 각지에서는 항일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교육부(교육성) 국민 교육국의 역사 교육 담당 린추엔루() 씨는 교과서 기술이 개방적이고 중립적이 되었다. 일본 시대에 대해서도 일본의 점령과 일본의 통치라는 말이 있지만, 최근에는 통치라는 표현이 증가했다. 국민당 시대에는 일본과 단교도 있어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라는 감정적인 기술이었다라며, 신구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무라 히로쓰구())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묻다] 3.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문제 알고도 손쓰지 않는 내각-한도 가즈토시() 작가

(10대 사건에) 순번을 붙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첫번째로 중일 전쟁을 들었습니다. 근대국가로 전환한 일본의 제국주의가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야심을 드러낸 시기입니다.

그 때까지의 일본과 중국의 흐름으로 보아, 터질 일이 터진 것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시나 유기 ()에서 아쿠타가와() 씨는 이러한 일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만, 중국이 얼마나 반일이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충돌하리라는 것은 당연히 걱정했지요.

그러나 일본의 역대 내각은 문제 해결의 의사가 없었습니다. 난징()을 취했으니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코우()를 점령했으나 이 또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군대를 내륙으로 전진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화평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손을 쓰지 않았다. 가장 큰 교훈이 아니었겠습니까?

러일 전쟁의 문제는 전쟁 그 자체보다, 이긴 일본이 중국에 대해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표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중국에 막연한 경의를 표해 왔지만, 상당한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중국 유학생이 와 있었습니다만,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확정 지을 무렵에는 유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양된 기분에 의식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신해혁명 때의 지사들 중에는 일본 유학생 출신이 많습니다만, 모두 쫓겨나 버렸습니다. 이들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3번째로 든 일본의 패배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게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말은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뿐으로, 일본인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1944년에 나온, 동남아시아 각국에 예의를 가르친다는 책에는 토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교만을 부리고 있었지요.

러일 전쟁 후의 일본이 강국, 대국 의식을 가진 끝에 벌어진 사건이 만주 사변으로, 모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일만의정서(満)를 보면, 미일 안보 조약 내용과 비슷합니다. 일만 공동 방위를 위해서 만주국 내에 일본 군대를 언제든지, 어디든지, 얼마든지 주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괴뢰 국가였습니다.

잠자는 대국에게 이긴 청일 전쟁은,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카쓰 카이슈()는 중국은 그 정도의 나라가 아니다, 우쭐해서 깔보는 것은 큰 실수다라고 소리 쳤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런 판단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국 전쟁은, 말 그대로 전후 일본에 있어서 가미가제()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주로 마시던 술은 소주에서 토리스로, 오션, 산토리 등의 양주로 바뀌어져 갔지요. 한국 전쟁이라는 특수가 없었더라면, 전후 부흥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이만큼 비참한 전쟁도 없었습니다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한국 병합(*)입니다. 국제적으로도 인지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문제는 그 후 일본의 정책을 보면, 타 민족과의 관계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지한 나라라는 것을 증명한 것과 같습니다. 민족의 긍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헤아리지 않았고, 정확한 정치 책략도 전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편 전쟁입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근대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여, 메이지() 유신을 촉진한 점에서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 일본인은, 일찍이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 아픔을 준 사실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인간은 역사를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자연스러운 교류를 위해서도, 잊지 말고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있습니다.

(인터뷰: 후쿠다 히로키())

*한국에서는 병합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강점이라고 표현한다.

한도 가즈토시 약력

1930년 출생. 문예 춘추 편집장 등을 역임. 역사 연구로 왕성한 집필 활동 중이다. 쇼와역사()(헤이본사()) 등 다수의 저서.

한도 가즈토시 작가가 선택한 10대 사건

중일 전쟁

러일 전쟁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

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청일 전쟁과 타이완 할양

한국 전쟁

한반도()의 분단

일본의 한국 병합

아편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