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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라이스도 모르게 북 김계관 독대

Posted September. 05, 200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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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 차관보의 막후 노력=힐 차관보는 알려진 대로 2005년 919합의 후 평양행을 시도했지만 강경파의 반대에 밀려 좌절됐다. 반대를 돌파하기 위해 힐 차관보가 낸 회심의 구상은 네오콘 그룹의 후원을 받는 제이 레프코위츠 대북인권특사의 동행 방북 카드였다.

라이스 장관과 힐 차관보는 2005년 3월 평양 방문 가능성을 논의했다. 당시 라이스 장관은 크리스, 당신이 평양에 가게 될 수 있겠지. 하지만 북한은 (정치적 선물로 간주되는 미국 관리의 평양 방문을) 공짜로 받을 생각을 말아야지라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제3자가 없는 북-미 간 양자 대화가 철저히 금지돼 있던 2005년 7월 이 원칙을 어기고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과 중국 베이징()에서 3시간 가까이 독대했다. 중국 관리의 댜오위타이() 만찬 초대에 두 나라 관리가 응하는 형식이었다.

힐 차관보는 그날 아침 만리장성을 둘러보다가 북한이 중국이 끼면 안 간다고 버틴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그는 만찬 초청자인 중국 관리가 불참할 수 있다는 사정을 알았지만 라이스 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실제로 만찬에 중국 관리는 불참했다.

만찬이 열린 그날 베이징에 도착한 라이스 장관은 뒤늦게 보고받는 자리에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힐 차관보는 그래도 김 부상이 (거의 1년 만의) 6자회담 복귀라는 낭보도 전했다며 위기를 넘겼다. 당시 한국 정부 당국자는 누가 먼저 만찬을 요청했는지는 공개 못 한다고 함구했다. 케슬러 기자는 힐 차관보의 제안이라고 썼다.

라이스 장관은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을 만나 왜 살짝 빠졌느냐고 따졌다. 리 부장은 절차보다 (회담 복귀 통보라는) 결과에 주목해 달라고 달랬다.

힐 차관보의 언론 홍보 집착도 책에 소개됐다. 힐 차관보는 언론 다루기의 귀재인 리처드 홀브룩 전 유엔대사의 문하생답게 언론 접촉을 즐겼다. 그러나 너무 언론에 시간을 쓰느라 협상전략을 마련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도 듣는다는 평가도 들었다.

폴란드대사였던 힐 차관보는 한국대사로 부임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것도 기록됐다. 그러나 케슬러 기자는 누구에게 어떻게 로비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중국의 북한 거들기=전체적으로 중국은 북핵 문제에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힐 차관보가 2005년 3월 중국 정부에 북한에 공급하는 원유를 끊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중국은 그러면 송유파이프가 고장난다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라이스 장관이 2005년 1월 인준청문회 때 북한을 두고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 of Tyranny)라고 지칭한 적이 있다. 케슬러 기자는 멍청한 일이었다고 단정했다. 한 중국 관리는 라이스 장관은 말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조지폐 걸림돌=라이스 장관은 2005년 3, 7월 중국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두 차례 만났다. 그때마다 북한이 미국 돈을 위조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이를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후 주석은 외교부의 보고를 받은 터라 심각성에 공감했다. 미 법무부가 대만 폭력조직 삼합회의 북한제 100달러 위조지폐 밀수 시도를 뉴저지와 캘리포니아에서 일망타진했다고 발표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온 8월 이전부터 미국 정부의 북한 압박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힐 차관보는 한국 기자를 만날 때마다 방코델타아시아(BDA)라는 마카오 은행을 얼핏 들어 봤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줄 몰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케슬러 기자는 재무부와 법무부는 BDA 은행이 주 타깃이란 점을 사전에 국무부에 충분히 설명했다고 썼다.

부시 대통령의 평화협정 구상=지난해 11월 베트남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미 평화협정 구상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해 4월 워싱턴을 방문한 후 주석과의 오찬 회담에서 처음 꺼냈다. 미국 협상가들이 구체적인 정책안을 놓고 토론하던 상황이었다. 후 주석은 그 자리에서 특사를 평양에 보내 부시 대통령의 돌파구 마련 의지를 전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중국의 메시지 전달과 무관하게 북한은 미사일 발사(7월) 및 핵실험(10월)을 강행했다.

미국의 고집=919합의 과정에서 미국은 고집스러운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가 중국에 압박을 받는 처지가 됐다.

6자회담 대표단이 9월 19일 최종 합의를 도출한 뒤 발표를 앞두고 긴장을 풀 무렵 라이스 장관이 휴대전화로 힐 차관보를 찾았다. 최종 합의문에 쓰인 평화공존(peaceful coexistence)라는 표현이 북한 체제의 인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강경파의 거부감 때문이었다. 힐 차관보는 문구 수정을 중국에 요구했지만 웃기는 일(ridiculous)이란 면박을 당했다.

결국 영문 표현은 평화적으로 공존한다(exist peacefully together)는 것으로 수정됐다. 중국은 한자로 쓰면 어차피 똑같다며 중국어 발표문의 수정을 거부했다. 한국 일본 러시아도 고쳐 쓰지 않았다.



김승련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