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郷)가 이겼다! 아시아에 아주 잠시 꿈을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중국 동북부(구 만주)로의 지배를 강화함과 동시에, 조선에도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점 지배를 노리고, 대 러시아 전쟁을 준비했다. 세계에서도 유수한 군사 대국을 이긴 일본. 그 승리는 동아시아에 무엇을 가져왔는가.
오랜만에 온 일본인데, 어디에 갈까
내가 잘 아는 사람으로, 금년 77세가 되는 군일 출신의 한국인 이 씨가 불쑥 도쿄로 찾아 온 것은, 올해 6월의 일이었다. 일본에서 자라 전후에 한국군에 들어가,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에서는 육군 소위로서 전선에서 싸웠다. 원래 나는 취재를 통해서 이 씨의 아들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씨와도 친해졌다.
러일 전쟁
1904~05년,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과 중국 동북부(만주 지역)의 지배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으로,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측 사망자는 약 8만 4천명으로청일 전쟁 시(약 1만3천명)의 6•5배나 된다. 러시아 측은 약 5만 명이다.
청일 전쟁 후, 러시아는 조선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극동의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1898년 청으로부터 뤼순(), 다롄()을 조차하여 철도 부설을 진행하였다. 모스크바 대학의 아이라페트프 조교수에 의하면, 러시아 대외 정책의 기본은 대양 진출이라는 해양 전략으로, 황제 니코라이 2세는 이 전략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고 한다.
1900년, 러시아는 의화단과의 일전을 위해 청나라로 출병하여, 진압 후에도 만주에 눌러 앉았다. 일본은 러시아와 교섭을 하면서 전쟁을 준비하였다. 교섭은 결렬되었고, 1904년 2월, 일본군은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 개시하였고, 현재 한국의 인천에도 상륙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12월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뤼순항()이 내려다보이는 203 고지를 점령하였고, 다음 해 1월에는 뤼순()의 요새를 함락하였다. 일본의 연합 함대가 5월,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해전에서 발틱 함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자, 미국의 테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강화를 알선하였다. 러시아 국내에서는 혁명 운동이 확산되어 혼란에 빠져있었고, 일본도 전쟁 비용 조달이 한계에 달하고 있던 때이어서 강화에 응했다.
가이드북을 읽은 이 씨가 고른 곳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물리치고 영웅이 된 도고 헤이하치로(郷郎)를 모시는 도쿄() 하라주쿠()의 도고(郷) 신사였다. 일본의 전술은 많은 참고가 된다. 도고(郷) 원수를 존경 한다
경내에 장식된 일본해(한국에서는 동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일본에서 일본해로 표기하므로 일본어 표기로 함) 해전의 그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주자 만족하는 것 같았다.
전 외무성 직원으로 메이지 시대의 외교를 연구하고 있는 마쓰무라 마사요시() 러일 전쟁 연구회 회장은 아시아의 신흥국이 유럽의 일대 강국에 도전한 전쟁으로, 국제적인 관심을 부르지 않을 수 없는 대 사건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외국 기자로부터 종군 취재를 하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했다고 한다.
1905년 5월, 도고(郷)가 지휘하는 연합 함대는 대마도에서 가까운 일본해에서 발틱 함대와 싸워 대 승리를 거두었다.
뉴욕 타임즈는 도고(郷), 러시아 함대를 격멸=위의 사진=이라고 1면 톱기사 취급으로 보도를 했으며, 그 뉴스는 1면의 거의 반 정도를 차지했다. 영국의 타임즈도 발틱 함대, 사실상 전멸이라는 도쿄 발 정보에 전 세계가 놀랐다라고 썼다.
승리에 흥분한 것은 일본인만이 아니었다.
후에 인도 초대의 수상이 되는 네루는 1930년대에 옥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아시아의 일국인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소년 시절, 그 일에 얼마나 감격했었던가를 너에게 자주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오오야마 사토시 (聡) 번역,아버지가 자식에게 들려주는 세계 역사, 미스즈서방()
중국의 혁명가 쑨원()은, 일본의 승리가 아시아뿐만이 아니라 이집트와 터키, 아프가니스탄 등의 독립 운동에 자극을 준 것을 지적하고 있다. 구미 대국에 억압받는 유색 인종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지식인들도 노란 사람들의 활약을 기렸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떤 한 인물을 떠올렸다. 프랑스로부터 베트남 독립 운동을 이끌고 있던 판 보이 쩌우()=사진은 초상화=(1867~1940)다. 쩌우는 러일 전쟁 소식을 들은 후, 1905년 봄, 비밀리에 출국하여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본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 것일까. 베트남을 방문했다.
동문동종()인데 / 베트남 격렬한 분노
하노이의 사회과학원 역사 연구소에서 오랜 세월, 쩌우를 연구해 온 츄온 타우 교수(72)가 쩌우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응접실에서 맞이해 주었다.
일본은 일찍이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진행시키고, 입헌주의를 도입해 대국 러시아를 이겼다. 동문동종()인 일본의 모습은,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많은 베트남인들이 일본을 주시했습니다. 동문이라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 동종이라는 것은 황색 인종을 의미한다.
일본에 도착한 쩌우는 요코하마에 망명 중이던 중국의 입헌 사상가 량치차오()=사진=를 방문했다. 량치차오는 청조 말기, 국정 개혁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탈출했다. 쩌우는 베트남에서 량치차오의 저작을 읽고, 책 말미에 적혀 있던 주소만을 의지하여 방문했던 것이었다. 유생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중국 고전을 즐겨 읽은 쩌우는 중국인, 일본인과 한자로 필담을 나눌 수가 있었다.
쩌우의 일본 방문 목적은, 프랑스와 싸우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무기와 병력 등의 원조를 얻는 것이었다. 쩌우는 량치차오의 소개로 당시 유력한 정치가였던 오쿠마 시게노부(隈), 이누카이 쓰요시() 등을 만난다. 그러나 오쿠마 등은 군사 원조가 일본과 프랑스 사이의 외교 문제가 된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하고, 우선은 인재육성에 힘을 쓰도록 설득한다.
쩌우는 일본의 유지들에게 자금도 얻었으며 유학 처도 소개를 받아, 베트남의 젊은이를 부르는 돈즈() 운동을 전개하였다. 유학생은 한때 200명이나 되었지만, 안주의 땅 일본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러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1907년 6월, 인도차이나와 조선의 지배를 사실상 서로 인정한 일불 협약을 맺는다. 프랑스 정부가 일본에 요구한 것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단속이었다. 일본 정부는 프랑스 식민지 정권과 결탁해, 베트남 유학생을 비롯하여 판 보이 쩌우까지도 추방했다. 동유()운동은 분쇄되었다. 하노이에서 구입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쩌우는 1909년 3월, 4년 동안 살아온 일본에서 쫓겨났다. 도쿄의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 고무라 주타로(寿郎) 외상 앞으로 보내온 쩌우의 직필 편지가 남아있다. 쩌우는 외상이 아시아의 황색 인종을 얕잡아 보고,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쫓아내고 있다며, 일본이 구미 열강과 손잡은 것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B4용지 크기의 종이를 반으로 접은 크기의 얇은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쓰여 진 편지를 손에 들자, 그의 격렬한 분노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일본을 배우는 청나라 학생 단속 규칙으로 경계, 반감
당시, 일본에는 청나라에서 온 유학생이 더 많이 있었다. 청나라는 청일 전쟁 직후인 1896년에 유학생 파견을 시작하여 1905년에는 그 수가 약 1만 명에 달했다.
청 말기 유학생의 사정을 잘 아는 리시스오() 난카이()대학 교수를 만나러 중국 텐진()을 방문했다. 리 교수는 청일 전쟁에서 왜 일본에게 졌는가. 그 이유를 알고자 일본으로의 유학과 시찰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구미에서 근대 사상과 제도를 처음부터 배우기보다는, 일본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구미보다 가까워 비용도 적게 든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되고, 일본이 새로운 공부의 장으로 여겨진 것도 큰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청나라에서는 전제 러시아에 대한 입헌 일본의 승리라는 견해가 대세를 이루며, 일본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중국 출신으로 야마나시 ()학원대학의 슝타윈() 교수는 일본의 승리는 중국 국민의 눈을 뜨게 하여, 입헌제 도입 움직임을 앞당겼다고 보고 있다. 1906년, 청나라 정부는 뒤늦게나마 입헌정치의 실시를 약속했다.
그러던 중, 유학생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1905년 11월, 청나라 유학생 단속 규칙을 공포했다. 유학생들이 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 한 청의 정부가 일본 정부에 단속을 의뢰했던 것이다. 유학생들은 이 조치에 대해, 수업을 보이콧하며 반발하였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이를 청국인의 방종 비열이라 비판하였고, 그것을 읽은 유학생이자 혁명파 활동가였던 첸티엔화()=사진=는 항의하여 도쿄 바다에 투신자살했다.
아시아의 강국인 일본에서 배우긴 했지만, 조선과 중국 동북부의 지배를 강화하는 일본에 대한 경계와 반감. 유학생의 마음은 모순으로 고민스러웠다.고 이 교수는 설명한다.
지금, 일본의 헌법 개정 움직임이나 역사 문제 등, 중국 측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문제도 있다. 이 교수의 제자인 대학원생 리시스와(来) 씨(25)는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에게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경계감. 일본을 보는 눈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습니다.
중국 피해를 준 침략 일본 식민지에 꿈을
한편, 현재 중국에서는 러일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격전의 땅인 뤼순()을 찾았다.
뤼순항()은 지금도 중국 해군의 중요한 거점으로, 일부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닐 수 없다. 뤼순(), 다롄()은 러일 쟁탈전의 장소였다. 일본의 승리는 중국 침략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었다. 뤼순()의 국방 교육 기지 러일 전쟁 진열관에서 본 중국어판 비디오다.
203 고지 기슭의 기념품 가게에서 일하는 한신유앙() 씨(82)는, 어린 시절 뤼순()에서 일본어를 배웠다고 한다. 유창한 일본어로 전쟁의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중국에 있어서 러일 전쟁이란 질문을 했다. 피해를 준 침략전쟁입니다. 일본이 러시아를 내쫓아 중국을 도왔다는 사람도 있지만, 틀린 생각입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고도 눌러 앉아 뤼순()을 지배해 버렸습니다. 이윽고, 중국 전 국토로 쳐들어 왔습니다. 온화하게 설득하는 듯 한 말솜씨였다.
그럼, 일본에서는 어떨까.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 야스쿠니(国) 신사의 유취관()을 방문했다. 러일 전쟁 코너에서는 군함 행진곡이 크게 울려 퍼지며, 일본의 승리를 전하는 영상이 흐르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동양의 소국이었던 일본이 대국 러시아에 이겼을 때, 러시아와 유럽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큰 꿈과 희망을 품게 하였던 것이었다. 자랑스러워하는 내레이션이었다.
그것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반도와 중국 등 일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꿈과 희망이 퇴색하는 스피드가 빠르지는 않았던가.
오에 시노부() 이바라키()대학 명예교수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전쟁 직후,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 하여, 아시아인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일본의 승리는 희망도 주었지만, 곧바로 실망도 안겨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
포츠머스 강화 조약
1905년 9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寿郎) 전권(외상)과 러시아의 위테 전권(전 재정부 장관) 등이 조인했다.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감독권을 인정한다.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취득한 뤼순(), 다롄()의 조차권 양도, 창춘() 이남의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을 일본에 양도한다. 연해주와 캄차카에서 일본의 어업권을 인정한다, 는 등의 내용이다. 거액의 배상금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일본 민중은, 강화 내용에 반발하여 도쿄에서 대 폭동을 일으켰다.
제 0차 세계대전
최근에 역사학자들이 러일 전쟁을 제 0차 세계대전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전쟁 종결로부터 100주년이 되는 2005년, 게이오 대학에서 국제회의가 열렸고, 이 전쟁을 제 0차 세계대전으로서 재평가하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회의 관계자인 요코테 신지(横慎) 게이오 대학 교수에 따르면, 제 1차 세계대전(1914~18)의 중요한 특징들을 러일 전쟁이 많은 점들에서 먼저 보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하나는, 러일 전쟁이 당시 국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구미 열강을 끌어들여 전개되었다는 점이다=그림 참조. 일본은 영국과, 러시아는 프랑스와 각각 동맹을 맺고 있었다. 예를 들면, 영국은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의 지배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어서, 일본과 동맹을 맺는 것이 유리했다. 미국은 러시아의 중국 동북부 점령을 반대하고 있던 관계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또 하나의 특징은 총력전이다. 무기가 발달하고 전쟁 규모가 확대되어, 모든 국력을 전쟁 수행에 쏟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총력전이라는 사고는 제 1차 대전 중에 확산되었지만, 러일 전쟁에서 이미 그러한 경향이 현저했다는 것이다. 또한, 모스크바 대학의 올레그 아이라페트프 조교수는 러일 전쟁은 육지와 바다의 총력전이었다.라고 한다. 육군과 해군의 효과적인 연계 작전을 펼치지 못하면 전쟁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국제화됨에 따라, 외국 여론을 아군에 유리하게 하는 선전전도 중요해 졌다. 일본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귀족원 의원인 가네코 겐타로(郎)를 미국에 파견해, 일본에 유리한 여론을 만들고자, 강연과 기자 회견을 통해 러일 전쟁의 정당성을 선전하였다. 러시아도 일본이 선전포고 전에 러시아 군함을 공격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것 등을 구미 여론에 호소했다.
연표 / 당시의 동아시아
1895 조선의 명성황후, 일본군 등에 의해 살해당함
1896 조선 국왕 고종,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간 피난 : 아관파천()
1897 조선국,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개칭
1898 러시아, 청나라로부터 대련, 뤼순의 조차권과 남만주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
1900 북경에서 의화단 사건(의화단의 난)이 일어남
1902 영일 동맹 조인
1904 러일 전쟁이 시작됨. 제 1차 한일 협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이 추천한 재정 및 외교 고문을 받아들임.
1905 포츠머스 강화 조약 조인. 제 2차 한일 협약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으로 만듦.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
1907 제 3차 한일 협약으로, 조선의 내정도 지배하에 놓임. 이 때의 각서로 군대가 해산 당함
1910 한국 합방에 관한 조약을 체결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히야네 데루오 교수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5)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오키나와의 체험에서 보이는 것-히야네 데루오() 류큐대 명예교수
오키나와의 근현대사를 축으로 10대 사건을 골랐다. 억압을 받았던 오키나와의 체험에는 동아시아와 공통점이 많다. 여기에서 근현대사의 중요한 논점이 부각된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있어서 오키나와전은, 이러한 시점의 원점이 된다. 오키나와전은 일본 국내의 지상전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의 일본군의 지상전과 같은 양상을 나타낸다. 일본군은 오키나와의 주민을 보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민을 회색분자로 간주하여 학살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전선에서도 일본군에 의한 주민 학살이 있었다. 그 연장선에 오키나와전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오키나와전쟁 후,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떨어져 나가 미군 통치 하로 넘어갔다. 미국은 냉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1950년대에 총검과 불도저로 형용되는 토지 접수를 강행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파괴하였다.
그러한 상황 하에서, 오키나와전이란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날카로운 의문이 제기되었다. 오키나와를 팔아버린 일본의 정책과 미국의 강경 정책이 밝혀져, 근대사의 재검토로 이어졌다.
오키나와에는 류큐 왕국의 독자적인 역사가 있었고, 일본에 편입될 때까지 아시아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는 책봉체제 안에서 다양한 예능 방면과 문학이 꽃을 피웠다. 이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 류큐 처분이었다.
단절과 동시에 일본으로의 동화 정책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에서는 근대의 입구에서 탈아(脱亜)와 동화()가 함께 전개된 것이다. 나는 이를 탈아동화라 부르고 있다. 동화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아시아와의 관계를 잘라 버리게 된다.
청일 전쟁은 그 전기가 되었다. 청은 류큐 문제에 대해 이의 제기를 하지 않게 되었고, 귀속 문제는 대국적으로 결착되었다. 그 후 탈아동화의 흐름을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자, 오키나와의 문화는 열등, 야만, 비문명적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일본의 아시아관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20 세기 초두가 되면 이하 후유()와 같은 학자가 나타나, 오키나와인의 역사 체험을 기반으로 한 오키나와 연구를 제창했다. 그것은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과 편견의 타파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이를 전후로, 아시아에서는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지식인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호세 리살, 베트남의 판 보이 쩌우, 중국의 루쉰() 등이다. 열강의 지배를 벗어나, 민족의 존엄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이것이 동아시아에서는 실천적인 학문으로서 일어났다. 거기에서는 오키나와 연구와의 사상적인 계보를 찾아 볼 수 있다.
제 2차 대전 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운동은, 당초에는 소박한 내셔널리즘이었다. 그러던 것이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질적 전환이 이뤄졌다.
가데나() 기지에서 B52 폭발 사고가 일어나자, 인근 주민의 불안이 높아졌을 뿐만이 아니라,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B52가 베트남 북부에 가한 폭격으로 무고한 베트남인이 살해당하고 있는 실상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복귀 운동은 피해자로서의 오키나와를 강조하고 있었지만, 오키나와가 베트남 전쟁에 가담하고 있다는 가해자 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반전 복귀 운동에 나섰다. 이것이 그 후의 기지 반대 운동으로 이어져 갔다.
전후, 오키나와와 아시아의 관계는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해자 의식이 자리를 잡게 되자 오키나와에서 아시아와의 공감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진정한 아시아 이해의 열쇠를 잡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다.
인터뷰: 요시자와 다쓰히코 沢
히야네 데루오() 류큐대 명예교수 약력
1939 년생. 근대 오키나와와 일본, 아시아 관계사를 연구. 현대 정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히야네 데루오 교수의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아시아 태평양 전쟁과 오키나와전
일본으로부터의 오키나와 분리와 미군의 오키나와 통치 개시
류큐 왕국의 폐절과 류큐 처분
류큐 문제를 둘러싼 청일간의 분쟁
청일 전쟁과 류큐 문제
메이지 정부의 동화 정책과 오키나와 연구의 대두
대만•조선 문제와 오키나와
일본 복귀 운동의 고양
베트남 전쟁의 격화와 반전 복귀 운동으로의 전환
대리 서명 거부 투쟁과 기지 반대 운동
[역사는 살아있다/러일전쟁]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메이지 일본이 운명을 건 러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를 크게 바꾼 식민지 지배. 이 두 가지 사실을 동아시아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를 살펴본다.
일본-강해지는 우월감 / 10년 전부터 기술
도쿄()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청일 전쟁에 이은 항목으로, 러일 전쟁을 양면 2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개전까지의 경위에 관해서는, 열강 각국의 국제 관계에 대한 설명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문에서는 러시아가 의화단 사건 후에도 군대를 만주에 주둔 시킨 것에 대해,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대항했음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프랑스가 러시아를 원조하고 있던 상황을 보여주는 관계 그림도 싣고 있다.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이 얻은 권익이 적다며 불만을 가진 국민이 정부를 공격하여 폭동까지 일어난 사실과, 계속되는 군비 확장으로 국민의 부담이 줄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이어진다.
일본의 승리는,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게 자극을 주어, 일본을 모방한 근대화와 민족 독립의 움직임이 높아졌습니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서 일본이 열강의 일원이 되었다는 대국 의식이 생겨나,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우월감이 강해져 갔습니다.
이 기술의 후반 부분은 1997년에 발행된 교과서부터 포함되었다. 전쟁의 영향력에 대해서, 가능한 한 다방면에서 설명하기 위해 유의했다며, 도쿄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 편집부장은 말한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약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러일 전쟁 후의 식민지화에 대해서 저항 운동이 일어난 것을 지적한 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910년,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력을 배경으로 식민지 지배를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조선사 수업을 금지하고, 일본사와 일본어를 가르치며,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왕궁 안에 조선 총독부가 세워진 사진과 일본어로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사진을 게재해, 당시의 모습을 알기 쉽게 전하고 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沢
중국-나라 안이 전쟁터였음에도 다루지 않고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에서는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한 기술은 전혀 없다. 한편,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된 의화단과의 싸움에 대해서는 8개국 연합군에 의한 중국 침략 전쟁이라는 타이틀로, 4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1900년 봄, 의화단 운동은 징진() 지역에까지 퍼져 갔다. 투쟁 방향은 직접, 제국주의 침략 세력으로 향하였다. 중략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 곳곳에 방화와 살해, 약탈을 감행하는 등, 그 악행이 끝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의화단의 난 또는 의화단 사건으로 불리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반제 애국 운동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학계 일부에서 이러한 위치 설정에 대한 반론이 나오고 있지만, 교과서의 기술을 재검토하려는 기색은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뤼순(), 랴오양(), 봉천(현재의 심양) 등, 중국의 중요한 장소가 전쟁터였음에도 자국사의 교과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국의 교과서를 잘 아는 게이오 대학의 또완뤼총(聡) 준 교수는 교전의 주체는 일본과 러시아다. 중국 측의 인식으로서는, 두 제국에 의한 전쟁으로 보기 때문에, 자국사로 인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는 고등학교의 세계사 교과서(인민 교육 출판사의 세계 근대 현대사)에 등장한다. 제국주의로 향하는 주요 자본주의국이라는 테마로, 러일 전쟁의 원인 등은 언급하지 않고, 조선의 식민지화에 중점을 두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 전쟁의 승리로 순풍을 타며 미국의 지지를 얻은 후, 조선을 식민지로 손에 넣었다. 1910년, 일본은 조선 정부에 한일 합병 조약(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했다)의 체결을 강요해, 조선을 정식으로 병탄했다.
사토 가즈오 )
한국- 지배와 수탈 51 페이지에 걸쳐
한국에서는 러일 전쟁이라 부른다. 전쟁과 함께,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자국사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먼저 러일 전쟁에 대해 전쟁에 이르는 경위를 포함하여 5줄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제 2차 한일 협약) 군대가 해산된 후의 의병 전쟁의 확대 식민지 지배 하에서의 교육, 언론 활동 물자와 인적자원의 수탈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919년에 일어난 3•1 운동에 이르기까지 51페이지에 달한다. 을사조약에 관한 부분은 이렇게 쓰여 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
1910년의 합방 조약에 대해서는, 국권 침탈이라는 항목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전국 각지에 배치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을 미리 차단하고,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매국 내각과 이른바 합방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창조하면서 발전해 온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의 노예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다.
한국인의 항일 민족 운동에도 중점이 놓여 있다. 예를 들어,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에 대해서는 민족 독립의 의사를 분명히 보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한일 간에 영유권 분쟁이 일고 있는 독도(일본명, 다케시마) 문제도, 이러한 일제 침략의 하나로 간주해,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일방적으로 독도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라고 쓰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구선희(姫) 사료 조사실장은 일본에 의한 침략의 서막이므로 제대로 가르치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사쿠라이 이즈미 桜
대만-입헌 운동에 미친 영향에 중점
러일 전쟁과 조선의 식민지화에 대해서, 대만의 교과서는 극히 간단한 기술이지만, 중국사와 세계사에서 다루고 있다. 국민 중학•사회(남일서국())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청조 말기의 입헌 운동 항목에서 5줄 정도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러일 양국은 중국 동북부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 영내에서 개전하였다. 이듬해 러시아의 패전으로 일본의 세력이 동북부로 들어갔다. 일부의 지식분자는 일본과 같은 조그만 나라가 대국을 누르고 의외로 승리를 거둔 것은, 일본의 입헌 군주체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 보고 입헌 요구를 해왔다.
1983년 역사 과정 표준에 의거한 교과서에서도, 러시아군의 동북부 강탈과 러일 전쟁의 항목에서, 러일 전쟁 전후의 양국과 청나라의 중국 동북부를 둘러싼 마찰을 설명했다. 계속 해서 러일 전쟁이 끝나자, 지식인들은 입헌이 전제를 이겼다며, 조야에서 끊임없이 입헌을 요구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구 교과서 모두 입헌 운동에 미친 영향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러일 전쟁 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었던 것에 대해 중국사 부분에서는 언급이 없고, 세계사 부분의 아시아의 민족 부흥 운동 항목에서, 항일운동에 중점을 두며 단4줄만을 할애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1910년 일본에 병합된 후, 끊임없이 항일운동이 제창되었다. 1919년에는 서울에서 대규모 항일운동이 일어났지만,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항일운동은 계속 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 한국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났다.
이 교과서의 편집 지도 위원 초호웨민(恵) 정치 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조선 병합에 대해서는 거의 기술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1902년의 영일 동맹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일 동맹이 없었다면 러일 전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업시간 관계로 많이 쓸 수 없다고 말한다.
다무라 히로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