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의 명예훼손 고소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딜레마에 빠졌다. 고심 끝에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등 피고소인 4명에게 검찰 출석을 요구했지만 한나라당이 사실상 소환을 거부하자 답답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딜레마에 빠진 검찰=이 후보 등에 대한 소환 통보를 마냥 미루면 예비 권력에 벌써부터 줄서기 하느냐고 비난할 것 아니냐.
검찰이 이 후보 소환을 통보한 사실이 알려진 19일 한 검찰 관계자가 이같이 토로했다. 이 후보를 소환하면 야당으로부터, 소환 통보를 계속 늦추면 고소인인 청와대는 물론 대통합민주신당 측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아야 하는 답답한 처지를 표현한 것이다.
청와대가 지난달 7일 고소장을 내면서부터 검찰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 고소의 주체가 사실상 검찰 인사권을 행사하는 청와대라는 점도 부담이었다.
실제로 고소장 접수 21일 만인 지난달 28일 고소인 조사를 끝낸 검찰은 임박한 정치 일정을 감안할 수밖에 없었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다음 달 27일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수사를 매듭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조계 주변에선 청와대의 이례적인 고소가 상황을 꼬이게 만든 1차적 원인이라는 시각이 많다. 이론상으로야 가능할지 몰라도 정부를 비난한 야당에 대해 최고권력 기관인 청와대가 고소를 한 것 자체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을 탓할 문제는 아니고, 청와대가 전례 없이 야당 대선 후보를 덜컥 고소한 것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후보 간 명예훼손 고소고발 사건의 처리를 외국처럼 진행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선거운동 때 제기된 후보 측의 명예훼손 다툼에 대해 수사를 3년 정도 끌면서 처리한다고 한다. 수사 기관의 선거 개입 논란을 최소화하면서, 정치인끼리 시간을 갖고 문제를 알아서 해결하라는 의도라는 것이다.
수사 난관 많아한나라당도 고민=이 후보 등이 끝내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검찰로서는 조사 없이도 명예훼손 사건을 종결할 수도 있다. 확보한 녹취록이나 영상물에 나타난 이 후보 등의 발언내용으로 형사처벌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에 대해 조사 없이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앞서 서울중앙지검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에 대해 4차례나 출석요구를 했으나 응하지 않자 권 후보의 기소 여부를 일단 유보했다.
한나라당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다. 대선 기간에 대선 후보가 직접 검찰에 소환되는 선례를 남길 수 있어 일단 거부하고 있지만 소환을 계속 거부하면 국가기관을 무시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후보의 당내 경선 캠프에서 법률지원단장을 맡았던 오세경 변호사는 검찰에서 무차별 소환 통보를 다시 조정해서 정도대로 수사한다면 조사에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정원수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