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를 하도 많이 만나서 이제 웬만한 미모에는 놀라지도 않는데, 김태희는 정말 예쁘긴 예뻤다. 곱게 빚은 도자기 인형 같았다. 그 미모로 그는 샤방샤방 미소를 날리는 CF의 여왕이 됐지만 작년 중천으로 호된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다. 그리고 13일 그의 두 번째 영화 싸움이 개봉된다. 소심한 결벽증 환자인 데다 절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상민(설경구)과 까칠한 성격의 진아(김태희)가 이혼 뒤 벌이는 전쟁. 김태희는 마스카라가 번진 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소리 지르고 발차기를 하고 쇠파이프까지 휘두르지만, 여전히 예쁘다고들 했다. 이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김태희는 조금 더 부담을 갖고 조금 더 욕심을 내며 다시 관객 앞에 섰다.
망가지기로 작정한 건가.
사람들이 내가 망가지기를 원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선택했다면 망가짐을 위한 망가짐이 된다. 그건 아니다. 사실 내가 망가졌다는 걸 의식하진 못했다. 좀 안 예쁘게 나오지만, 세팅된 예쁜 모습만 보여 줘서 그게 식상했던 분들은 좋아할 수도 있고 아닌 분들은 실망할 수도 있다.
한지승 감독의 드라마 연애시대는 봤나? 감독의 장기인 섬세한 심리묘사가 영화에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도 있다.
봤다. 연애시대는 잔잔한 드라마고 주인공들은 서로 미워하기보단 아이 때문에 헤어진 거지만 영화 속 두 남녀는 미움밖에 없다. 누구나 너 없인 못 살아 하다가 너 때문에 못살아가 된 경험이 있지 않나.
그런 경험이 있나?
결혼을 해서 환상이 깨지고 구질구질한 일상이 되는 경험을 해본 건 아니지만, 과거 남자친구를 많이 사랑했고 헤어지고 나선 상처도 컸고 잊기 힘들었는데 세월이 지나니 잊혀지더라. 사람이 간사하다. 변한다.
다양한 싸움을 보여 주는데,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장면은 뭐였나.
후반부에 진아가 나 이혼한 거 후회하기 싫고 하면서 감정을 분출하는 장면. 제일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감독의 의도처럼, 싸움도 사랑일까?
그렇다. 사실 미워하면 자기 힘만 빠진다. 미워하는 건 아직 어떤 에너지를 그 사람에게 쏟고 있다는 것이다. 쏟을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실제로 싸울 때는 어떤가.
화가 나고 억울할 땐 눈물부터 나오고 계속 버벅거리지만 내 살을 깎아먹는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모든 걸 다 털어놓는 편이다.
어렸을 땐 내성적이었다고 들었다.
어릴 땐 슬픈 영화를 보면서도 울지 않았고 기뻐도 이를 드러내고 웃지 않았다. 대학교 1, 2학년 때 친구들만 해도 내가 팬 미팅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걸 보고 놀란다. 그게 연기에 장애가 되는 것 같아 이젠 감정을 억누르지 않게 됐고 감정의 기복이 좀 심해졌다.
중천에서 연기력에 대한 혹평이 나올 때 기분이 어땠나.
악플을 봐도 정말 터무니없는 것은 화가 안 난다. 그러나 내가 봐도 찔리는 것은 속이 상하고 상처가 된다. 당시에는 내 연기의 부족한 부분을 잘 몰라 상처를 안 받았다. 이제는 안다. 연기에 진심을 담는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항상 궁금했다. 연예인이 안 됐다면 그 미모에 그 능력에, 칭찬만 받으며 평탄하게 살았을 텐데 연예인이 돼서 스캔들에 시달리고 비난도 받는다. 혹시 후회하지 않나.
시작하기 전엔 갈등이 많았다. 고민 끝에, 기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했다. 가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했다. 지금은 연기를 하게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받고 억울할 때도 많지만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됐고 삶이 더 풍부해졌다고 생각한다.
채지영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