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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만주 사변과 만주국 (상)

Posted December. 24, 200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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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을 휩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를 추구하는 기운이 세계적으로 고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満)라 불리고 있던 중국 동북부에서의 권익 확보와 새로운 확대를 겨냥하여 무력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이것이 만주 사변(満変)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 대륙에서 수렁 창에 빠진 듯 한 싸움이 시작되었고 미국과도 대립하게 된다.

만주 사변 (満変)

일본이 중국 동북부(만주(満))와 내몽고 동부를 침공한 전쟁. 사변 기간은 좁게는 1931년 9월 18일의 류타오후(条) 사건으로부터 1933년 5월 31일의 탕구() 정전협정까지를 말한다. 넓게는 일중 전면 전쟁이 일어난 1937년 7월 7일의 루거우차오() 사건까지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 정부는 부전조약(戦条) 등의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 전쟁이 아니라, 사변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일부러 내각결정을 내렸다.

일본은 러일 전쟁으로 얻은 뤼순(), 다롄() 등의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만철)의 경영권을 특수 권익이라 부르며 중시했다. 이를 되찾으려는 중국 측의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일본이 상주시키고 있던 관동군이 펑톈()(지금의 선양()) 근교의 류타오후(条)의 만주철도선을 폭파하고는, 중국군이 폭파했다라는 구실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다. 이를 류타오후(条) 사건이라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満)와 내몽고 동부의 영유를 목표로 했지만, 육군 중앙부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조(清) 마지막 황제 푸의()를 앞에 세워 만주국을 만들고 정권을 조종했다.

릿톤 조사단

만주 사변을 조사하기 위해서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 미▪영▪불▪독▪이태리의 5개국이 위원을 1명씩 선출했고, 영국인 빅터 릿톤 경이 위원장을 맡았다. 릿톤은 인도 총독의 아들로 벵갈 주지사 등을 지냈다.

조사단은 1932년 2월말부터 일중 양국을 돌면서, 같은 해 가을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본의 군사 행동은 자위 조치로, 만주국이 자발적인 독립 운동으로 태어났다는 일본의 주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이익에도 배려를 하여, 연맹 주도 아래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열국들이 지도하는 자치 정부 설치를 제안했다.

릿톤 조사단에게 전해진 책자 TRUTH. 유엔 유럽 본부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동 도서관 제공)

1932년 3월, 릿톤 조사단(릿톤은 앞줄 왼쪽에서 2번째)은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만주의 진실, 파란 봉투가 도착했다

비 오는 밤하늘에 소방차 사이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2007년 9월 18일 오후 9시 18분이었다. 이날 나는 중국 선양()시의 9•18 역사박물관앞에 서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선양()시에서 행사를 개최한다. 76년 전 이날 밤, 일본 군대가 갑자기 근처에서 무력 공격을 시작하여, 순식간에 중국 동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기념식은 그 기억을 되살리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공습경보를 상기시키기 위한 사이렌이 3분간 울렸다. 광장에 모인 고교생과 병사, 무장 경찰관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직립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일 후항일 전쟁을 테마로 한, 가까운 푸순()시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기 3년 전까지 중국 동북부에서 군 세력의 실력자였던, 장쭤린()=사진=의 손자인 장뤼스() 씨(45)이다. 심포지엄 주최자가 초대했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장쭤린()에게서 군사 세력을 계승한 장쉐량()은 뤼스() 씨의 백부이다. 쉐량()은 만주 사변 후에는 동북지방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일 전쟁 후 대만으로 옮겨갔다. 그 일족도 마찬가지였다. 뤼스() 씨가 일족의 고향인 선양()으로 돌아온 것은 올해 5월이었다.

일본인이 중국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과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던 장쉐량()이었지만, 뤼스() 씨 등 친족들에게는 자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관동군이 만주 사변을 일으킨 다음 해,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변의 실태를 파악하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 국제연맹이 만주 사변의 원인 조사와 해결 방법을 검토하기 위해서 보낸 릿톤 조사단이다. 그 보고서는 당시의 많은 일본인들이 믿고 있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을 그리고 있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연맹으로부터 탈퇴하게 되었으며, 일본 내에서 배외주의, 반구미주의가 강화되었다.

릿톤은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의 눈에는 무엇이 비쳤는가. 나는 릿톤 일행이 걸은 길을 따라 가 보기로 했다.

공산당과의 싸움을 우선시해, 일본군에게는 저항하지 않았다

무릇 국제연맹이 조사단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만주 사변이 일어났을 때, 난징()을 수도로 하는 국민 정부의 지도자장제스()는 국내에서의적인 중국 공산당 세력을 괴멸시킬 것을 선결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에게는 저항하지 않고, 국제연맹 무대에서 결착을 도모하기 위해 즉시 제소했다.

제1차 대전 후 탄생한 국제연맹으로서는 처음으로 맡는 중대한 국제 분쟁이 되었다. 일본은 연맹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었으며, 중국도 만주 사변이 발생하기 4일 전에 비상임 이사국으로 뽑힌 직후였다. 현재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의 지위와는 반대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단은 1932년 2월에 일본에 도착했다. 우스이 가쓰미() 쓰쿠바대 명예교수의 저서에 의하면, 릿톤 등은 도쿄()에서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 등 정부 요인과 연달아 회견을 갖고, 일본의 입장에 관해 정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아라키 사다오() 육군 장관은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의 좁은 국토로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가 없다. 일본은 아시아 대륙으로 자원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에 진정한 정부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나는 중국을 통일된 문명국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중국 대륙으로 옮겨 간 릿톤 등은, 난징()에서 장제스()를 비롯한 정상들과 회담한 후, 베이핑()(지금의 베이징())에서는 장쉐량()을 만났다. 자신의 거점이었던 만주(満)를 빼앗긴 장쉐량()은 일행을 환영하는 연회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둥산성((満))은 인종상, 정치상, 경제상으로도 중국과는 분리할 수 없다 분규가 일어난 진정한 원인은 중국이 통일하려는 것을 일본이 질투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둥산성((満))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중국은 통일될 수 있는가. 이 점에서부터 중일의 주장은 정면에서 맞서고 있었다.

일본에 의해 접촉을 방해 받은 학생들 편지로 고발

릿톤 일행이 중시하였으며 가장 고생을 한 것은 만주에 사는 일반 주민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었다. 일본과만주국측이 조사단의 안전을 지킨다는 구실로 주민과의 접촉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회견은 항상 많은 곤란 속에서 비밀리에 행해졌다고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주민들은 어떻게 릿톤 조사단에 접근하여 무엇을 전한 것일까. 9•18 역사박물관의 왕찌엔슈에 () 연구원에게 물었더니, 당시의 펑톈()(지금의 선양())에 있었던 공티엔민()이라는 은행가의 이름을 꺼냈다.

왕 씨의 설명은 이러하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 10만 명 이상의 선양() 시민들이 베이핑() 등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공() 씨는 남아서 침략자에게 저항을 시작했다. 기독교 청년을 모아서 의용군을 지원했다. 그는 릿톤 조사단에게 편지를 쓰도록 학생들에게 호소하였고, 많은 학생들이 편지를 썼다고 한다.

보고서에도 실제로, 만주국에 반대하는 학생과 청년으로부터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

2005년 7월, 선양() 현지 석간지 선양만보()는 공티엔민()의 당시 활동을 전하는 기사를 실었다. 아들인 공꿔씨엔(国) 씨의 인터뷰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공() 씨 등 9명으로 결성된 그룹은 릿톤 조사단이 오는 것을 알고, 사변이 일본 측에 의해 계획된 것이었으며 만주(満)의 신정권이 일본인에 의해 컨트롤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려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자료를 몰래 모아 TRUTH(진실)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자를 만들어, 선양()에 거주하는 영국인 목사에게 건넸다. 목사는 자택에 릿톤 등을 불러 저녁 식사를 하였고, 그 자리에서 몰래 책자를 건네주었다. 목사는 우연히도 릿톤의 친척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확실한 것일까.

왕 () 씨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러한 에피소드가 있을 뿐,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쪽에서는 아직 책자도 확인되지 않았다라는 대답이었다. 공꿔씨엔(国) 씨에게도 아는 사람을 통해 취재를 부탁해 보았지만, 확실한 이유 없이 거절당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희망을 건 곳은 국제연맹의 자료를 보관하는 제네바의 유엔 유럽 본부 도서관이었다.

TRUTH은 정말로 릿톤의 손에 건네졌는지요?라는 물음에, 이틀 후 관계 사료 안에 있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은 파란 천으로 표지를 하여 철한 앨범으로 같은 파란 천으로 된 봉투에 들어 있었다. 봉투에는 핑크색 실로 TRUTH이라고 자수가 놓여 있었다. 75개의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주된 건명을 보면,

1931년 9월 18일 이래, 일본 병사에 의해서 총살당한 죄 없는 시민들의 리스트

학교 교과서에 고쳐 적고 삭제한 리스트

일본군 헌병에 의해서 검열된 편지

이들 자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영문으로 타이프한 27 페이지의 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증거 중 몇 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입수했다라고 사정을 밝힌 후, 류타오후(条) 사건의 계획성과 그 후의 주권 침해, 만주국 건국에 관해 일본의 군 당국이 행한 활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만주철도선의 폭파는 무력 공격의 구실로 꾸며낸 일이다 만주국의 건국은 일본인에 의해 준비되고 조종되었다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결론은 절실한 호소였다.

만주 인구의 95% 이상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생각해 줬으면 한다. 중국인은 이대로 중국인이기를 바라며, 영원히 중국인이기를 원할 것이다책자를 만든 9명은 전원, 본명과 직업을 서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명 등 작성자를 알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다. 연맹 측이 9명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잘라냈을지도 모른다.

9•18사변 이후, 중국인이라는 의식이 강해지다

조사단은 만주 체제 중에 1550통의 편지를 받았다. 보고서에 의하면, 2통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만주국 정부와 일본인에 대해서 통렬하게 적의를 표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었다.

공사의 회견과 편지 및 진술에 의해 제공된 증거를 신중하게 검토한 결과, 만주국 정부는 현지 중국인에게는 일본 측의 앞잡이로 간주되어, 중국 측의 일반인에게는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일본군의 행동에 대해서는 자위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일본 측의 주장을 물리쳤다.

릿톤 보고서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 챈 일본은, 보고서가 공표되기 직전인 1932년 9월에 만주국을 승인했다. 다음 해,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정하는 권고를 가결했을 때에는 한 국가만이 반대하여, 일본은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던져 버리고 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 사변을 경험한 사람은 중국에서도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현지 역사가에게 부탁을 해, 선양() 시내의 양로원에 사는 95세의 싼리츠() 씨를 만났다.

그는 최북단 헤이룽장()성에서 태어나 자랐다. 류타오후(条)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국민당이 동북지방을 버렸다고, 모두가 수군거렸다고 한다. 이듬해, 마을에 나타난 일본군에게 저항하여, 마을의 반일회에 참가한 그는 마침내 항일게릴라전에 참전하는 병사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항일운동에 참가함으로써, 자신이중국인이라는 의식을 키워 왔다.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의 부핑(歩) 소장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편 전쟁 이후, 조금씩 키워 온 중국인으로서의 의식은 9•18사변과 그에 계속 된 항일전쟁으로 단번에 높아졌습니다. 중국인이 단결하는 특별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沢)

사변에 의해서 탄생한 중국 동북부의새로운 국가의 내막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내일 지면에서.

만주 사변 무렵의 세계와 일본

1920년대, 국제사회에서는 워싱턴 체제라 불리는 협조 질서가 생겨났다.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발족되었다. 해군군축()조약과, 중국 영토와 주권 존중을 합의하는 9개국 조약도 체결되었다. 1928년에는 전쟁 포기를 목표로 하는 부전조약(戦条)도 체결되었다.

한편, 일본 육군에게 있어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과 공산주의는 위협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29년에는 세계 공황이 시작되었다. 야마무로 신이치() 교토대 교수의 저작에 의하면, 1931년 농가에서는 딸을 파는 일이 속출했고, 결식아동도 급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도시에서는 실업자가 넘쳐났고 노동쟁의 건수는 최고에 달했다. 다음 해에는 자식과 함께 자살하는 일이 잇따라, 1900년 이후 실시한 사망원인 통계조사 개시 이래로, 자살 사망률이 최고를 기록했다. 절망적인 사회•경제 상황이 만주국 붐의 배경이 되었다.

장쉐량()

(1901~2001)장쭤린()의 장남. 아버지가 관동군에게 살해당한 후 펑톈()파 군벌을 계승하자 국민 정부에 합류했다. 1936년,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한 장제스()를 연금해 항일로 전환할 것을 강요했다. 이로 인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지만 장쉐량() 자신은 유폐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후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

관동군

일본이 중국의 동북지방(만주(満))에 둔 상비군. 일본은 뤼순(), 다롄()을 포함한 랴오둥()반도의 조차지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산하이관()동쪽에 위치해, 관동주()라고 불렀다. 이 조차지와 일본이 경영하던 남만주철도(만철)를 지키기 위해서 둔 군대가 그 전신이다. 1919년, 관동() 도독부의 개혁으로 군사 부문이 떼어내져 독립된 관동군이 탄생했다. 병력은 만주 사변까지 1만 명 남짓 머물렀다. 장쭤린() 폭살사건과 류타오후(条) 사건은 모두 관동군 참모의 모략이었다. 만주 사변 후에는 병력을 증강해, 항일운동의 진압과 화베이(), 내몽고로의 침략 공작을 담당했다. 후에 생물병기 개발을 위한 인체 실험을 실시한 731 부대도 관동군의 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