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흰 눈에 덮인 거대한 산악에서, 헬기로 산정에 올라 오직 바람과 구름만이 스쳐 지나 살결처럼 고운 눈밭을 스키로 내려올 때의 느낌. 이는 즐거움 이상의 환희다. 스키 자체에서 오는 단순한 쾌락이 아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 됨을 알게 됐을 때, 아니 자연이 나를 품어 주었다고 생각할 때 다가오는 평화로움에서 잉태된 희열이다.
헬기도 떠난 험준한 산악의 한 정상.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오로지 대자연뿐이다. 설산의 고봉이 파도처럼 몸을 일으켜 대지를 뒤덮은 산의 바다, 바람소리 외에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는 절대 침묵의 허공. 파란 하늘과 하얀 설산 사이에는 오직 나 자신밖에 없는 듯하다. 이때 엄습하는 처절한 고독은 깊이와 무게를 잴 길이 없다. 자연에 파묻혀서야 비로소 순수의 감정을 되찾는 현대인. 캐나다 셀커크 마운틴(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켈로나)의 헬리스키 여행이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44년 역사의 헬리스키 명가 CMH(Canadian Mountain Holidays)의 고딕스(Gothics) 로지를 소개한다.
스키와 애프터스키를 100% 만족시키는 CMH
토요일 오전 캐나다 로키산맥의 관문인 캘거리(앨버타 주)국제공항. 공항터미널 3층의 호텔 로비는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전 세계에서 날아와 하룻밤을 예서 보낸 CMH 헬리스키 참가자의 출발 준비 때문이다. 이들을 열두 곳의 로지로 실어 나를 버스는 벌써 도착해 화물칸을 열어 둔 상태다. 내가 일주일간 묵기로 예약한 곳은 셀커크 마운틴의 고딕스 로지. 44명 정원의 로지에는 43명이 예약을 마친 상태로 동양인은 세 명뿐이다.
셀커크 마운틴은 캐나다 로키산맥 서쪽의 컬럼비아 산맥에 있다. 1964년 이곳에 도착한 한스 모저는 단번에 이 산에 매료됐다. 고향(오스트리아 알프스)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모습 때문이었다. 산악가이드인 그는 여기서 헬리콥터를 떠올렸다. 헬기로 산을 올라 스키로 내려오는 환상과 더불어. 그 환상은 현실로 이뤄졌고 헬리스키의 원조 CMH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캐나다 로키산맥을 향해 북상하던 버스는 밴프(밴프국립공원의 중심타운)를 경유해 셀커크 마운틴의 산속으로 들어갔다. 장장 7시간의 버스여행. 고딕스 로지는 인가가 전혀 없는 해발 900m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객실은 모텔급이지만 여타 시설은 수준급이다. 특히 마음에 든 것은 스파 시설로 눈밭에 사우나와 자쿠지까지 갖췄다. 이곳은 오후 3시쯤 스키를 마치고 돌아온 스키어가 가장 먼저 찾는 휴식처. 와인 잔과 맥주 캔을 들고 나와 자쿠지에 몸을 담근 채, 아니면 사우나를 마친 뒤 땀을 식히며 담소하는 장소다.
스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스키와 애프터스키(스키를 벗은 이후 여가활동)다. CMH는 이 주장을 100% 뒷받침하는 멋진 곳이다. 헬리스키도 좋지만 애프터스키는 그보다 더 좋고 훌륭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스키어는 스키만큼 애프터스키도 잘 탄다. 왜냐하면 스키잉 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7시간인데 잠들 때(오후 10시)까지 그만큼 계속될 애프터스키를 그냥 무료하게 보내서야 어디 스키의 깊은 맛을 제대로 즐기겠는가.
그런 걱정은 적어도 CMH에서는 하지 않아도 된다. 스파에 모여 하루 전적을 자랑하다 보면 오후 한때가 훌쩍 지난다. 그리고 저녁이면 와인&다이닝이 기다리니까. 로지에서는 디너를 모두 한 식구처럼 함께 즐긴다. 그 장소는 바를 겸한 식당. 거기의 와인 셀러(저장고)에는 가격이 적당하고 괜찮은 와인이 가득하다. 덕분에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돌아가며 자신이 고른 와인을 나누며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세 코스의 디너는 일급호텔 수준이어서 와인과 함께 즐기기에 훌륭했다.
하루 10번의 환상적인 다운힐
오전 9시. 헬기의 강풍에 로지 마당에 서 있던 스키어 모두가 몸을 잔뜩 웅크렸다. 헬기는 뒤 칸에만 12명이 타는 중형. 그래서 11명씩 4개 조로 나누어 조 단위로 움직인다. 조마다 가이드(1, 2명)가 배속되는데 이들은 철저하게 훈련받은 공식 산악가이드이자 스키어다. 헬리콥터는 한 대가 온종일 산악을 오르내리며 4개 조를 차례로 매번 다른 산정에 올려주는데 하루 착륙횟수만 150회를 기록할 만큼 바쁘게 움직인다.
드디어 셀커크 마운틴의 한 능선 위. 해발 2400m의 능선에서 바라다 보이는 셀커크 마운틴의 풍광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그 설산에 남은 이는 12명의 스키어뿐. 급경사 설면으로 먼저 가이드가 내려갔다. 그 뒤를 스키어가 하나 둘씩 따라 붙는다. 이 슬로프의 눈은 보푸라기가 일 듯 날리는 것이 간밤에 내린 신설이다. 이런 눈에서는 스키를 타도 플레이트가 눈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닥으로 느껴지는 촉감은 부드럽기 이를 데 없고.
헬리스키의 다운힐은 언제나 환상적이다. 내 스키자국을 뒤돌아보면서 설면에 새겨진 멋진 S라인 커브에 모두들 감탄한다. 그러나 갈 길이 바쁘다. 헬기 도착 전에 픽업할 약속장소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길이 녹녹지 않다. 때로는 좁은 계곡사면을, 가끔은 숲 속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헬기를 기다리는 동안 휴식을 즐기는데 이때 스키어마다 초콜릿이며 파워바(에너지축적용 비스킷)를 꺼내 에너지를 보충한다. 로지의 현관에 비치해 둔 것인데 체류하는 동안 무한정 공급된다.
헬리스키는 이런 식으로 하루에 10회 이상 진행된다. 청명한 날은 햇빛이 쏟아져 눈이 부신 높은 산정으로, 흐리거나 눈발이 날리는 날은 전나무 숲 속에서 트리스키를 즐긴다. 트리스키 중에 만나는 트리 웰(나뭇가지에 가려 눈이 쌓이지 않는 바람에 2m 이상 쌓인 눈으로 인해 우물처럼 움푹 파인 나무 밑 공간)은 복병이다. 빠지면 헤어나기 힘들 정도로 깊다. 매일 아무도 없는 설산의 눈밭에서 모두 함께 모여 헬기로 공수해 온 뜨거운 수프와 샌드위치, 샐러드로 식사를 하던 헬리스키 런치.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됐다.
조성하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