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 세상을 떠난 허주() 김윤환은 한국 정치사에 남을만한 킹 메이커였다. 2명의 대통령(노태우, 김영삼)과 1명의 대통령후보(이회창)를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적 5, 6공 정치인이었던 그는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이른바 개혁공천에 밀려 물갈이됐다. 허주는 배신당한 충격에서 헤어 나지 못했고 끝내 암()으로 사망했다. 이회창 씨는 투병 중이던 허주를 찾아가 사과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작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 박근혜 캠프 좌장 격이던 김무성 최고위원이 어제 물갈이라는 말은 인격모욕이라며 발끈했다. 당 일각에서 4월 총선을 앞두고 현역 의원들을 대폭 물갈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대한 반응이었다. 공천 탈락이 정치인에게 줄 충격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총선 때마다 40% 안팎의 현역 의원과 지구당위원장들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표현이 다소 모욕적이어서 그렇지, 물갈이는 정치 쇄신을 바라는 국민의 요구이자, 정당의 선거 전략이다.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 어제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3선 명예제대를 신고합니다라는 제목의 보도 자료에서 박수칠 때 떠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육사 17기인 김 의원은 5공 국가안전기획부 기획조정실장, 6공 총무처장관을 거쳐 1996년 국회에 진출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는 조선노동당 2중대 정동영은 조선노동당 통일장관 등의 발언으로 꼴통 보수 소리를 들었지만 원조 보수로서 소신을 지켰다는 평가도 있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에 오래 안주해온 정치인이라면 물갈이의 모욕을 당하기 전에 아름다운 뒷모습이라도 보여주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대선 참패의 책임 문제로 연일 소란스러운 대통합민주신당이나 민주당에선 왜 총선 불출마나 정계은퇴를 선언하는 의원이 한 사람도 없을까. 역시 책임 불감증 탓인가.
권 순 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