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세계의 변화를 오인했다
중국 동북부에 만주국을 건설한 일본은 마침내 중국과의 전면 충돌을 시작한다.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은 손을 잡고 대항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은 중국에 참화를 불러왔지만, 즉흥적인 진군은 일본 자신의 파국을 초래하는 길이기도 했다. 전선은 이윽고 중국을 넘어 확대되어 갔다.
아주 젊은 부관장이란 생각이 들어 나이를 물었더니 37세라고 했다. 베이징() 교외의 중국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에서 만난 리종위웬() 씨다. 관장도 올해 47세로, 나와 동갑이라는 사실에 조금은 놀랐다. 인민 항일 전쟁, 일본에서는 일중 전쟁이라 하는 이 전쟁의 기록과 기억을 계승하고 대외적으로도 설명을 하는 중직에, 지금은 3-40대 사람이 기용되고 있다.
전쟁 종결로부터 62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좀 더 노년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얼마 전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 50대 2명이 최고 지도부에 들어간 것을 떠올리면 과연 여기저기에서 세대 교대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항일 전쟁은 긴 세월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세계적으로도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물론 리() 씨는 중국의 공식적인 견해도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이쪽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틀에 박힌 대답만은 아니었다.
항일전쟁에 동원된 중국 민중들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더듬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은가라고 최근 일본에서의 연구서를 예를 들어 물었더니, 리() 씨는 필요성을 인정하며 중국에서도 그러한 연구가 있는지 어떠한지. 일본에서 책이 나왔다면, 꼭 읽어 보고 싶네요라고 말했다. 나쁜 것은 일본이라고 일축하지도 않고 빈정대는 말투도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사사가와 유지() 사이타마대()교수들이 쓴 후방의 중국 사회였다. 지금까지 별로 주목받지 못 했던 일중 전쟁 당시 중국 측의 총동원 체제에 대해서 억지로 군인이 되거나 식량을 징수 당하거나 한 농촌의 실태를 역사 자료를 통해 세밀하게 조사하고 있다. 덧붙이면, 일본의 침략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역사적 사실로서 일중 전쟁의 전체 상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다.
기념관의 전시가 2년 전부터 조금 변했다. 오로지 공산당의 전투로만 그려져 온 전쟁이었지만, 거기에 장제스(/장개석)가 인솔하는 국민당 정부군의 설명이 조금 추가되었다. 리() 씨는 초등학교 시절, 국민당 정부군은 항일 전쟁에 소극적이었다고 배웠다며, 그 말은 옳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국민당 정부군의 역할은 적극적이었다고 평가되어 진다고 말했다.
세대 교대 진행되는 중국 / 기념관도 새 단장
이러한 미묘한 변화는 난징()에서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난징대학살 기념관을 둘러싸고도 마찬가지이다. 대학살 기념관이 아니라, 평화 기념관이라 개칭하자는 안이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라고 여러 관계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학살이 있었던 것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가 일본에서 존재하는 한 당치도 않는 시기상조라며 없었던 일로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단장한 난징대학살 기념관은, 사건으로부터 70년이 되는 올 12월에 개관한다. 반일강화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실제로는 반전 평화의 취지를 더욱 강조하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한다. 난징() 사범 대학에서 만난 장리엔훙() 교수는 서로가 부의 유산을 제대로 응시하여 미래를 향한 평화적인 관계를 쌓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 때에는 기념관의 명칭도 바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면, 난징대학살 연구 센터 주임을 맡고 있는 장() 씨도, 작년에 40살이 되었다고 한다.
세대교체는 중국의 도시 그 자체에서도 현저하다. 내년 올림픽 개최를 향해 달리고 있는 베이징()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인구 700만 도시가 된 난징()에서도 가는 곳마다 고층 빌딩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본디, 물과 녹음이 아름다운 고도이지만 시 중심부에서는 분진 때문인지, 길을 걷는데도 마스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본 기업들도 잇달아 진출해 난징시() 세수입의 3할을 외자가 차지한다.
국제도시에서 전투 / 일본의 횡포에 주목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한 전쟁이었다.
발단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어난 일중 양군의 소규모 충돌이었다. 지금은 베이징() 중심부로부터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인민 항일 전쟁 기념관은 다리 부근에 있다. 그 다리 끝에는 베이징() 올림픽의 마스코트 그림을 벽에 장식한 작은 가게가 있어, 과거와 미래가 함께 있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누가 먼저 발포했는지는 지금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확실한 것은, 중국에서, 일본군이 야간 연습을 끝냈을 쯤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일본은 1900년 의화단사건(북청 사변)에 열강과 함께 개입한 이래로, 지나()주둔군을 두고 있었다.
애당초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중국 등은 일격에 굴복할 것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근대화로 앞서 있던 일본은 전선을 끊임없이 확대해 결국은 파국을 향해 나아갔다. 통수권을 방패로 한 군부의 독주였다. 그 군내부에서조차 갈라진 의견, 눈앞에 사로잡힌 점과 선의 진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최대 요인은 중국에서 높았던 내셔널리즘과 국제 사회의 동향을 모두 오인했던 것이다.
청일,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이후, 대중국 21개조의 요구로부터 만주 사변, 그리고 만주국 건설등, 일본은 중국에서 제 마음대로 행동해 왔다. 만주국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주변의 5성()을 지배하에 두려는 획책도 있었다. 일본 내에 있어서도 청일 전쟁 이후로 중국인에 대한 멸시가 두드러진 때였다.
누구든지 인내하는 데는 한도가 있다는 것을 당시의 일본은 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뒤떨어진 사람들이라고 일본이 업신여겼던 중국은,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각 지역이 서로 다른 제도로, 지방 군벌의 지배를 지탱하던 화폐 제도 하나만을 보더라도, 영국의 도움을 받아 통일했으며,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격렬하게 싸우던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군과 공산당이, 거짓말로라도 항일로 발을 맞추게 된 시안() 사건은, 일중 전쟁이 시작하기 전해였다. 국민당 정부에 의한 징병 제도도 시작되었다.
루거우차오()에서 시작된 전쟁은 상하이()에까지 이르렀지만, 중국측에서는 국제도시에서의 전투로 인해일본의 횡포에 세계의 주목을 모으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미, 부전 조약도 있었고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9개국 조약=키워드=도 있었다. 제1차 대전의 엄청난 참화에, 세계는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회피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늦게 찾아온 제국주의 국가 일본은, 양쪽 조약에 가입해 있으면서도, 때 늦은 제국주의인 채로 돌진해 갔다.
전쟁 개시 당시, 수상은 고노에 후미마로(麿)였다. 국민적인 인기를 얻어 그 자리에 앉은 직후였다. 하지만, 고노에()는 불확대 방침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결국은 군부를 추인하면서 역주했다. 뒷날, 수기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당시 이러한 사건이 발발한 것은 정부 사람들은 당연히 알지 못했고, 육군 본성에서도 알지 못했던, 오로지 현장에 있었던 군의 책모에 의한 것이었다 힘이 모자라서 중국 전부가 전란에 휩싸여, 국민들 또한 이유 없는 출사()로 괴로워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출사()란 출병을 말한다. 이유 없는출병--. 게다가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더 나아가 한커우()로 뻗어가는 전선에,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현지 조달을 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주민들은 비참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본에서 중국 전선에 참전한 병사를 만났고, 난징()에서는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노인을 방문했지만, 들어 보면 들어 볼수록 지옥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신문에서는 황군의 진격을 날마다 부추기고 국민들은 전쟁의 결과에 취해 있었다.
전쟁 초에는 전쟁이 수렁에 빠지는 것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중국 독일 대사 트라우트먼을 통한 평화 공작의 시도는, 눈앞의 전과와 지워버리기 힘든 낙관 속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국민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발표해버리자 계획성도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접근하는 미국과 중국 / 초조해 지는 일본의 위험
일중 전쟁을 더듬어 보면, 일본이 무궤도한 행동에 암담해지지만, 이 전쟁을 정당화하는 주장도 일본에서는 끊이지 않는다. 특히, 정계에서는 지금까지 일중간의 불씨가 되어 왔다. 양국의 역사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이를 걱정하는 한 사람, 자민당의 노다 다케시() 중의원 의원은, 아시아에 대해,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적어도대중국 21개조 요구에서는 분명하게 일본의 침략적 행위가 전면에 나왔다라고 말한다. 일본 측에서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학문의 장에서 검증해 나가야 하며, 정치의 세계에서는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郎)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国) 참배 문제로 일중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역사 문제는 다시 불이 붙었다. 일본군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은 아베 신조() 정권을 거쳐서, 후쿠다 야스오() 현 정권이 들어서서 이제 겨우 침착성을 되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으로는 어떠할까.
2 자릿수 성장으로 현저하게 대두한 중국은, 일전의 공산당 대회에서 앞으로의 5년 동안의 신체제를 정돈했다. 미국에서는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앞으로 4년간의 신체제가 정해진다. 유력한 후보,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미국과 중국은 21 세기에 있어서 최대 중요한 2국간 관계라고까지 단언하였다. 정치적인 혼미 상태가 계속되는 일본은 초조함에 가까운 내셔널리즘(노다() 씨)을 한층 더 높이게도 될 지도 모른다.
베이징()과 난징()에서 내가 느낀 중국 측의 잘 알 수 없는 여유는, 단지 세대 교대에 의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중 전쟁을 둘러싼 인식은 중국에게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일부러 내세워 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인한 내부의 모순도 안고 있어 불필요한 자극은 피하고 싶은 것도 크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어쨌든 중국은 지금 바쁘다.
올해, 가치관 외교라는 말이 자민당 속에서 나왔다. 하지만, 가치관이 다른 나라와 어떻게 교제를 하는가가 외교다. 내셔널리즘을 전면으로, 변해 가는 중국과 세계를 다시 일본이 오인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전쟁의 교훈은 도대체 무엇이었냐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후쿠다 히로키()
일본은 중국에서 뻗어 나간 전선을 더 한층 타국으로 넓혀 갔다. 거기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에.
*한국에서는 중일전쟁이라는 표기하지만, 본 기사에서는 일본의 표기대로 일중전쟁으로 합니다.
키워드일중 전쟁
1937년 7월부터 약 8년 동안에 걸쳐 일본이 중국을 침략 전쟁이다. 지금의 베이징() 교외에서 일어난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전면 전쟁으로 돌입하여, 1941년 아시아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된 후, 1945년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전쟁 중, 일본은 많을 때에는 약 100만 명의 병력을 중국에 주둔시켰다. 양국의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사망자는 누계 약 45만 명이라 보고 있다. 중국 측은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으로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 전쟁으로 간주하고 이 동안의 중국 군민의 사상자 수는 3500만 여명이라는 것이 중국 정부의 공식 견해다.
만주국을 세운 일본은, 남쪽의 화북 5성으로부터도 장제스()가 인솔하는 국민당의 영향을 제외하려고 분단 공작에 들어갔다. 한편, 중국 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치 항일로 내전을 중지하고 있었다.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자, 당초에는 불확대 방침이었던 제1차 고노에() 내각이 군부 선행으로 파견 증가를 결정해, 중국 측은 철저한 항전 태세에 들어갔다. 일본은 처음에는 북지()사변, 후에는 지나()사변이라 부르며,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지만, 이는 미국의 중립법 적용을 초래해 군수물자의 수입이 막히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8월에는 상하이()에서 전투가 시작되고, 승리한 일본군은 더 나아가 수도 난징()으로 진격해 12월 13일에 점령하였다. 이를 전후로, 병사도 민간인도 구별하지 않고 난징()대학살 사건을 일으켰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일본군은 이 전쟁에서 독가스와 세균을 사용하고, 인체 실험을 했으며, 성 폭력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거듭하였으며, 무차별 폭격도 가했다.
국민당 정부는 난징()에서 충칭()으로 수도를 옮겨서 항전을 계속했다. 공산당의 팔로군()도 게릴라전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부전 조약과 9개국 조약을 개의치 않는 일본의 전쟁 행위는 국제사회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지만, 1941년에는 대미영 개전으로 전선을 확대해 갔다.
키워드9개국 조약
1922년 2월, 미국의 요청으로 열린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포르투갈, 그리고 일중 양국의 총 9개국이, 중국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의 존중, 문호 개방, 기회 균등 등을 확인하고 합의한 조약이다. 무력으로, 중국에게 새로운 권익을 요구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일본의 진출을 견제하는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구미 제국주의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메모고노에 후미마로
(1891~1945) 일중 전쟁에서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3번 수상을 역임했다. 공작 고노에 아쓰마로(麿)의 장남으로 태어나, 귀족원 의장 등을 거쳐서 1937년 6월에 제1차 고노에() 내각을 발족시켰다. 직후부터 시작된 일중 전쟁에서는 전선을 확대시켜, 난징()을 공략한 다음 달인 1938년 1월에 이후 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을 내고 평화의 길을 닫아 버렸다. 같은 해, 국가 총동원법을 성립시켜 전시 통제 경제를 추진하고, 동아 신질서를 주창한 제2차 고노에() 성명을 발표했다. 1940년 제2차 내각에서는 대정익찬회(賛会)를 결성하는 한편,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제3차 내각에서 일미 평화 교섭에 실패하여 총사직한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으로 출두를 명령받아 음독자살했다.
메모 장제스 ()
(1887~1975) 중국 저장성() 태생이다. 이름은 중정()으로, 제스()는 성년이 된 후의 이름이다. 일본에 유학한 후, 쑨원()의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1928년에 난징() 국민당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외국과 싸우려면 우선 국내의 안정이 필요하다고안내양외(内) 를 내걸어,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다. 그러나 1936년 12월, 항일을 위해 내전 중지를 요구하는 장쉐량(学)등에 의해 시안()에 감금되었다(시안()사건). 파견되어 온 공산당의 저우언라이(来)등의 설득도 있었기에 요구를 받아들이고 난징()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국민당 정부군을 인솔하여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일본이 패전한 후,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지자, 타이완(湾)으로 피해 사망할 때까지 초대 중화민국 총통을 맡았다.
많은 피를 흘리며 무수한 비극을 낳은 일중 전면 전쟁-. 이 전쟁에 대해서,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어떻게 배우고 있을까. 각 나라에서 폭넓게 사용하고 있는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를 비교해 본다.
일본 - 난징()대학살이란 호칭을 바꾸다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도쿄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에서는, 일중 전쟁과 전시하의 일본 사회체제를 2페이지에 걸쳐 취급한다.
일중 전쟁의 시작에 대해서는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 에서 일어난 일중 양국군의 무력 충돌(루거우차오()사건)로부터, 일중 전쟁이 발발했습니다라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한편,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은, 국민당 정부를 대신하는 친일 정권의 출현을 기대하여, 이들과 화평 교섭을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민중의 항일 의식은 한층 더 높아져, 일본의 단기 결전 예상은 빗나가고, 일중 양국이 총력으로 싸우는 전면 전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낙타로 물자를 운반하는 일본군 병사의 사진을 실고 일본군에게는 장기화되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의 비축도, 보급 수단도 부족했습니다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보급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전쟁을 계속한 것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다.
일본군에 의한 가해 행위나 잔학 행위에 관한 기술은 적고, 난징()사건에 대해서도 본문과 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군은 (중략) 수도 난징을 점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중국인을 대량으로 살해했습니다(난징()사건)=본문
이 사건은, 난징()대학살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만, 국민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주
동사의 10년 전의 교과서에서는, 사망자 수는 약 20만 명이라고도 한다라고 본문에서 기술했으며, 사건의 호칭도 난징()대학살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러한 가해 행위 기술은 자학적이다라는 비판이 일본 국내에서 일어난 영향으로 고쳐진 형태다.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 편집부장은 희생자의 수는 여러 학설이 존재하는 것을 배려했다. 호칭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는 대학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주에 나타냈다라고 말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沢))
한국 -항일의 시점에서 7줄만 기술
일중 전쟁은, 한국에서는 중일 전쟁이라 부른다. 중학교에서는 세계사를 취급하는 사회 2에서 다루고 있다.
집필자가 취재에 응해준 디딤돌 출판의 교과서에서는, 제2차 대전과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 등에 대해, 3군데에 걸쳐 총 7줄 정도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적극적으로 침략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였다(중・일 전쟁)
중일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은 순식간에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끈질긴 항쟁으로 일본군은 중국 대륙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다시 협력 관계를 이루어, 함께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제2차 국・공 합작)
집필자인 김육훈 태릉고교 교사는 미국이 일본을 꺾어, 제2차 대전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많지만, 중국 민중의 저항도 일본의 패배에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자국사를 취급하는 국사는 1 종류 뿐인 국정교과서이다. 여기에서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한국인의 독립 운동과 중국 측과의 협력을 중시하고 있다. 1932년 상하이()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인 등을 살해한 윤봉길의 의거를 채택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의 침략을 경계하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으며,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이 한국인의 항일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난징()사건에 대해서는, 고등학교의 세계사에서 가르치고 있다. 금성 출판의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일본은) 화북으로 진출하여 전면적인 침략 전쟁을 시작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난징에서는 수십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난징대학살)
사쿠라이 이즈미(桜)
중국 - 12 페이지 사진을 많이 사용하여 생생하게
중국에서 반수 이상의 학교가 사용하고 있는 인민교육 출판사의 중국 역사 8년 급에서는, 중화 민족의 항일 전쟁이라는 단원에서, 전면 전쟁의 발발에서부터 일본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12페이지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전쟁의 발단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1937년 7월 7일 밤, 일본군은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군사 연습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병사 1명이 실종한 것을 구실로, 완평현성()의 수사를 무리하게 요구했고, 중국 수비군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을 도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일본군은 난폭하게도 중국 수비군을 향해 진공하고, 완평현성()을 포격했다. (중략)전국적 규모의 항일 전쟁이 여기서 발발했다. 루거우차오()사변은 7•7 사변이라고도 불린다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중국의 역사 과정 표준에서는 중일 전쟁에 대해서, 7•7 사변의 역사적 사실을 약술하고, 중국의 전 민족적 항전이 시작된 것을 안다 난징()대학살 등을 예를 들어, 일본 군국주의의 흉폭하고 잔인한 침략 본질을 인식한다 대아장(児荘)격전과 백단() 대전등의 역사적 사실을 들어서, 용맹 과감성과 희생을 마다 않는 정신을 실감한다, 라는 3가지 점을 요구하고 있다.
교과서는 이 방침에 충실히 따른 내용이며, 주요 전투에 대해서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 일본의 교과서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또한, 중국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서는 근거지의 군민들을 지도하여 완강히 항전하였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다라고 평가한다.
난징()대학살에 대해서는 2페이지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4장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는 것 외에도 100명 살해를 겨루고 있는 장교들을 알리는 신문의 한 지면도 소개하고 있다. 피해자 수의 기술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재판의 통계에 의하면,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6주 동안에 학살당한, 무기도 가지지 않은 주민과 장병의 수는 30만 명 이상에 달한다
사토 카즈오()
대만 - 황민화 운동 강화에 초점
대만 교과서에서는, 중일 전쟁은 중국사, 대만사, 세계사 모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널리 사용되는 남일 서국()의 국민 중학•사회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중일 전쟁과 중공() 정권의 발전이란 단원에서 약 2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민족의 활력은, 중국 공산당의 발전과 일본의 침략에 의해서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중국인은 8년에 이르는 고난의 항전을 거쳤으면서도 전쟁의 악몽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개별적 전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난징()사건에 대해서만은 일본군은 난징()에 진입하여, 죄가 없는 민중 30만 명을 참살하였다고 하는 난징()대학살이란 참사를 일으켰다라고 말하고, 100명 살해의 상황을 전한 일본 신문의 사진도 싣고 있다.
대만사 부분에서는 식민지 통치의 강화라는 단원으로 약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특히 전시 체제하에서의 황민화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6년, 총독부는 황민화, 공업화, 남진 기지화를 선언했다. 대만은 전시 체제에 들어가고, 황민화 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대만 호적을 가진 군인•군부가 대량으로 징용되었으며, 그 중에는 전선에 보내져 위안부가 된 여성도 있었다
또한, 세계사 부분에서도 제2차 대전 설명 중에 2줄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국민당 정권 시대인 1983년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장제스()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 한편, 항일 통일 전선을 같이 진행한 공산당에 대해서는 항전을 위장하여 지반을 확장했다라고 비판을 했지만, 현재 교과서에는 이러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남일 서국()의 교과서 편집 지도위원인 초호이민(恵)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공산당 세력 확대로 이어진 1936년의 시안()사건이 없었더라면, 중일 전쟁의 발발이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전쟁 그리고 장제스()에 대한 소개보다도, 시안()사건과 중일 전쟁에 관한 밀접한 관계를 설명했다라고 편집 방침을 말했다.
다무라 히로쓰구()
역사는 살아있다 동아시아 150년 시리즈
지식인 20명에 듣는다--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1)
기미지마 가즈히코() 도쿄 가쿠게대(学) 교수
일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의 상호 이해를 공고히 하고, 공통의 역사 인식을 만들기 위해 중요한 사항을 선택했다. 일본인의 이해가 모자라는, 중국과 조선의 저항 운동을 중시했다.
우선, 일본인 자신의 손으로 전쟁 범죄를 재판할 수 없었던 것도 포함하여, 철저하지 못했던 도쿄 재판을 지적하고 싶다. 미국은, 15년 전쟁(만주(満) 사변에서 제2차 대전까지)의 최대 책임자인 쇼와() 천황을 면책했다. 미소의 냉전이 진행되고, 재판은 1948년 철저하지 못한 상태로 끝났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개전시의 도조 히데키(条) 내각의 상공장관으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기시 노부스케()씨는, 석방되었고 이후 수상으로서 정치의 중심에 섰다. 철저하지 못했던 전쟁 책임에 대한 추궁은, 오늘날의 일본 정부와 정치가가 과거의 침략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역사 인식으로 이어져,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2번째는, 15년 전쟁과 중국, 조선이다. 이 전쟁은 일본에 의한 중국 침략 그 자체다. 식민지 조선은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가 되어, 노동력과 병력의 공급을 강요당했다.
한편, 중국, 조선쪽에서 보면, 항일 전쟁과 독립 운동의 중요한 시기이며, 현재의 정권이 존재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이 3번째이다.
4번째는, 조선의 식민지화다. 일본의 교과서에는, 일본의 지배가 가혹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의병 투쟁 등 다양한 저항이 있었던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일본인이 이러한 끈질긴 저항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역사 인식의 차이가 좁혀질 것이다.
5번째는, 제1차 대전과 민중 운동이다. 일본에서는 쌀 소동이 일어났고, 조선에서는 3•1 독립 운동이,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나, 민중이 역사를 움직이게 되었다.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지배로 인해, 권력의 노골적인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6번째는 일본의 패전이다. 중국, 조선은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양쪽 모두 두 개의 정권이 생겨 대립했다. 일본에서는 평화 헌법이 생겼다. 그러나 한국 전쟁을 계기로 재군비가 진행되어, 자위대가 창설되었다. 더욱이 일본은, 미일 안보 조약에 의해 미국의 체제로 편입되어 진다.
7번째로, 재일 코리언(한국•조선인)을 들고 싶다. 왜, 재일 코리언이 일본에 살고 있는지, 일본인도 본국의 한국인도 잘 모른다. 전후, 그들은 어떠했는지. 한국으로의 귀국, 북한으로의 귀국운동이 있었다. 일본 사회에서는 취직, 거주, 결혼을 둘러싼 차별도 심각했다. 재일 코리언은, 외국인등록증에 지문 날인을 거부하는 운동 등을 전개하며 차별과 싸웠다. 일본인이, 가장 친밀한 이웃인 재일 코리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한국인과의 교제도 어렵다.
8번째는, 중국, 조선,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지배하고 있을 때에도, 민예 운동가인 야나기 무네요시(悦)와 같이, 조선의 문화를 이해한 일본인은 있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이를 이해한다면, 침략 저항이라는 시점뿐만이 아니라, 서로를 보다 깊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9번째는 러일 전쟁이다. 조선 식민지화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일본은 열강의 지지를 얻어 동아시아를 침략했다. 아편 전쟁 후, 구미 열강이 진출해, 아시아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갔다. 동아시아 근대사의 시작을 마지막으로 든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리스트
철저하지 않았던 도쿄 재판
15년 전쟁과 중국•조선
중국의 항일 전쟁과 조선의 독립 투쟁
조선의 식민지화
제1차 세계대전과 동아시아의 민중 운동
일본의 패전과 중국•조선의 해방
재일 코리언의 과거와 현재
일본인의 조선, 중국 인식과 조선인, 중국인의 일본 인식
러일 전쟁과 조선
구미 열강의 아시아 진출과 일본, 중국, 조선의 대응
약력
1945 년생. 역사 인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의 연구자와 공통 교재 일한 교류의 역사(아카시 서점), 한글판은 한일교류의 역사-선사부터 현대까지(혜안)를 이번 봄에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