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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아시아•태평양전쟁과 국공 내전(国内戦)

제7장 아시아•태평양전쟁과 국공 내전(国内戦)

Posted February. 22, 20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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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미 개전에 이르기까지 18만 8천 명

전사자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라는 정신적인 구속

일본군이 싸운 지역을 보면, 새삼스런 말 같지만 그 광대함에 놀란다. 확실히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미증유의 싸움이었다. 이번 (상)에서는 왜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을 단행했는지를 살펴보고, (하)에서는 일본의 패배에 이어서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국공 내전을 살펴보기로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테러와의 싸움과 (지구 온난화의) 탄소 가스입니다.노인은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말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고도, 지금도 지구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다. 나는 그의 말을 새겨들으며, 네라고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해군 중령이었던 기야마 마사요시() 씨(98)이다.

대(対) 미 전쟁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던 과정을 그리려고 여러 가지 자료를 읽고 있는 동안, 개전을 결정하고 이끌어 가던 측의 육성을 꼭 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개전으로부터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려서, 당시의 중요 인물들은 벌써 세상을 떠났고, 국책이라고 불린 국가의 중요 정책을 기안한 육해군의 참모 장교들도 이미 잠든 후였다. 대본영 육군부에서 당시 가장 젊은 참모 장교였던 세지마 류조(瀬) 씨가 2007년 9월에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무리인 줄 알면서도 일단은 해 보는 것이 신문기자의 일이다. 각 방면으로 수소문을 하던 중, 친절한 분이 기야마() 씨를 소개해 주었다.

구마모토현(県) 출신의 기야마씨는, 해군 기관 학교를 나온 엘리트 장교였다. 개전 당시에는 군 중앙부 소속은 아니었지만, 1944년 1월부터 해군성 군수국원()으로서 연료 정책의 책임자가 되었다. 전시 군 중앙부의 분위기를 직접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전후에는 해외에서 귀국한 귀환자들의 일자리를 위해 연료 회사 등을 세웠다.

개전할 무렵,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습니까?가장 궁금했던 질문하자 즉시 대답을 주었다.

나는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턱없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미국과 전쟁을 해도 이길 가망은 없었다. 군인들의 조금은 고만 증후군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턱없이 어리석은 행동 해군에서 그 당시 이렇게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기야마씨 뿐만이 아니라, 수뇌 진영에도 많이 있었다. 미일 개전의 결정 과정을 연구하고 있는 모리야마 아쓰시() 시즈오카현립대(静県) 강사는 당시, 일본에는 나라의 운명을 걸어가면서까지 미국과 싸워야 할 이해관계는 없었다. 미국의 여론도 압도적으로 중국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을 위해 자청해서 피를 흘렸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결과로 보면 매우 기묘한 전쟁이었다라고 한다.

기묘한 전쟁 / 석유 수출입 금지가 계기로

그러면, 기묘한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 7월 이후의 경과를 지난 호의 줄거리풍으로 대충 훑어보기로 한다.

일본은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면 중국은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 정부는 벽지의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항전을 계속했으며, 이를 영국과 미국이 지원 중일 전쟁은 수렁 상태로 빠져 들어, 일본군은 대 미영 개전까지 실로 18만 8천여 명이라는 전사자를 냈다. 한편, 히틀러가 인솔하는 독일이 유럽에서 전쟁을 일으켜서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항복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군사 동맹을 맺어, 미국과 영국에 압력을 가하려 함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미국의 강경 자세를 부르게 되었고, 당시의 일본은 석유 수입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으나, 1941년 8월 미국은 전면적인 대일 수출 금지를 결정.

일본은 미국의 석유 수출입 금지에 의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국면에 처하게 되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선택지는 크게 말하자면, 둘 중의 하나였다.

석유 등 중요 물자를 얻기 위해, 네덜란드령이었던 인도네시아와 영국령의 말레이시아 등을 무력으로 제압한 것, 즉 장제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영국과의 전면 전쟁을 단행하는 것이다.

아니면, 중국으로부터의 철병 등의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쇼와() 천황도, 당시의 고노에 후미마로(麿) 수상도 전쟁은 피하고 싶었다. 미국은 지금 정도의 군사 초강대국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자동차의 생산 대수만을 비교하더라도 일본의 100배나 되는 압도적인 공업 분야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육군이 중국으로부터의 철병이라는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 주장을 잘 말해주는 것이, 10월 14일 내각 회의의 도조 히데키(条) 육군성 장관의 발언이다.

철병 문제는 심장 그 자체다. 미국의 주장에 그대로 복종한다면, 시나 사변(変)의 성과는 괴멸하고 만다. 만주국도 위태로워진다. 나아가, 조선 통치도 불안정해진다. 시나 사변(変)은 수십만 명의 전사자와 수배가 넘는 유가족, 그리고 수십만의 부상자, 수백만의 군대와 1억 국민들이 전장과 내지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군대를 주둔 시키는 것은 심장이다. (생략)양보, 양보하고 또 양보를 해서, 거기에 이러한 기본을 이루는 심장까지 양보할 필요가 있습니까? 여기까지 양보했는데, 이런 걸 두고 외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건 항복입니다.

육군은 식민지 통치에 미칠 영향은 물론, 호락호락 군사를 철병하는 것은 메이지 이래의 육군 주도의 대륙 정책을 부정하는 것이며, 위신 실추로 이어지게 된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덧붙여, 전쟁 전의 일본은 전사자들에게 미안해서라도 은 할 수 없다라는 레토릭이 넓게 횡행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러일 전쟁 후 원로인 야마가타 아리토모(県)가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관둥저우(関)의 반환 문제에 관해, 20억의 자재와 20여 만의 사상을 치르고 획득한 전리품을 반환할 수는 없다라는 취지를 밝혔다. 이와 같은 전사자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라는 심리적인 구속이자 주장을 정당화시키는 레토릭이 전쟁을 계속하게 만들어, 본토 결전 직전에까지 이르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정부와 군부 안에서는, 미국과의 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넓은 태평양에서 함대끼리 서로 싸우게 될 해군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해군이 절대로 전쟁은 할 수 없다라는 자세를 고수했다면, 대미 전쟁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상의 적은 미국이라는 이유로, 전쟁 준비를 위한 예산을 받아 온 해군이 질것 같아 할 수 없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부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해군에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사정에 어두운 채로 / 새로운 해군 장관은 개전을 결의

고노에 수상은 도조(条)의 군대의 주둔은 심장이라는 발언이 있은 2일 후에 사직한다. 쇼와 천황은 후임으로 도조를 선택했다. 도조라면 육군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한번 더 국책을 백지로 돌려 재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군부의 톱인 육군, 해군 장관, 참모총장, 군령부 총장 4명 가운데, 신 내각에서 교체 된 것은 해군 장관뿐이었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발상의 전환은 어렵다. 게다가, 도조는 해군이 추천한 피전파(戦)의 해군 장관 후보를 거부했다. 갑작스럽게 해군 장관이 된 시마다 시게타로( 郎)는 중앙의 사정에는 어두운 인물이었다.

시마다()는 10월 30일 오후, 피전파의 사와모토 요리오(沢 頼) 해군 차관 등을 불러서 개전을 결의했음을 알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직 중앙의 움직임도 잘 모르지만, 며칠 동안의 분위기를 종합 판단하면 이번 대세는 용이하게 만회할 수 없다.

사와모토(沢)의 일기에 따르면, 사와모토는 이후 다시 시마다와 만나서 결의를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

사와모토 : 육군에게(미일) 교섭 조건 완화에 관한 재고를 요구해야 합니다.

시마다 : 그런 일이 하면, 20만 명의 죽은 육군 영령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게 된다. 시나 사변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돌리는 생각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사와모토 : 그것을 바꿀지 않을 지가 문제입니다. 생각을바꿔서는 안 된다고 하는 데에 육군의 완고함이 있습니다. 이를 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와모토의 마지막 끈질김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들 수 없다라는 레토릭 앞에는 통하지를 않았다.

해군도 개전을 결의했지만, 도고 시게노리(郷 徳) 외상은 더욱 더 즉각적인 개전에 저항했다. 여기에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도고(郷)가 짜낸 비책을 소개한다.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 11월 1일의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는 다음날 미명까지 17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월말까지 외교 결착을 보지 못하면, 12 월 초에 개전하기로 결정을 했다.

문제는 미국과의 교섭을 하는데에 있어 어디까지 양보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미 정부와 군부의 조정으로 일본 측의 최종안(갑 안)은 정해져 있었지만, 도고 외상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새로운 안(을 안)을 제시했다. 일본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남부 프랑스령 인도지나)에 진주하여, 미국의 석유 수출입 금지를 불러 일으켰지만, 거기에서 북부 쪽으로 철수하는 대신에, 미국은 일정량의 석유 수출을 인정한다는 것을 안목으로 한 내용이었다.

이는 으로는 결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도고가 중국으로부터의 철병 문제에 대해서는 건드리지 않은 채 개전을 피하기 위해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최근 호소야 지히로( ) 히토쓰바시대() 명예 교수와 사토 모토에이( ) 주오대() 교수가 미일 교섭에 관계되는 문서를 찾아내어, 을 둘러싼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문서에는 일미 교섭 경위(하권)라고 제목이 붙어 있고, 개전 다음 해에 가세 도시카즈(瀬 ) 미국국 1 과장이 정리했다.

비장의 카드의 양보 내용 / 외교 전보로부터 삭제

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특별한 고려에 근거하여, 으로부터 남부 프랑스령 인도지나 주둔 중의 일본군은 북부에 이주할 뜻이 있다라는 구절을 제외한 것을, 으로 해서 전보를 쳤다.

다시 말해,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양보에 관한 내용에 관해서는 워싱턴의 일본 대사관에 보낸 외교 전보에서는 일부러 넣지를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포함한 것은, 최종 교섭을 위해서 서둘러 파견한 구로스 사부로(来 郎) 대사가 가져가도록 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이 문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도고는 외교 전보의 암호가 미국 측에 해독될 위험성을 감안해서 비장의 카드의 내용을 삭제했을 것이다. 암호 해독으로 미국 측이 사전에 눈치 채 버리면 비장의 카드의 효과는 약해진다. 아울러, 일본도 미국의 외교 전보를 감청하여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미국 측은 이 11월 20일에 제시된 후 그 대안을 정리했다. 일본이 북부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병력을 2만 5천명 이하로 하면, 일본에 민간 주유용 석유를 수출한다는, 3개월 동안만 유효한 잠정 협정 안이었다. 미국으로서는 전쟁 준비에 시간을 더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헐 국무장관은 25일에는 잠정 협정안을 일본 측에 제시할 생각이었지만, 다음날인 26 일 저녁에 발표한 것은, 프랑스령 인도지나와 중국으로부터의 일본의 전면 철병을 요구하는 등의 강경한 기초 협정 안(이른바 헐 노트)이었다. 왜 하룻밤에 사이에 미국 측의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만약, 이 잠정 협정 안이 제시되었다면 12월의 개전은 없었을 것이고, 전쟁 그 자체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미일 개전을 반세기 이상 연구해 온 호소야() 씨는 이렇게 말한다.

개전이 3개월 늦어졌다면, 일본이 기대하던 독일의 전황은 바뀌어, 미국의 군비는 정비되었겠지요. 일본으로서도 개전을 결정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졌을 겁니다. 나는 전쟁이 가져온 참화, 특히 인적 희생을 낳은 것을 생각하면,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한 와신상담의 선택도 어쩔 수 없었다고 봅니다.

사토 가즈오()

진주만 화해를 다음 세대에게

진주만 공격이 있었던 12월 7일, 하와이에서는 예년과 다름없이 올해도 추도식이 열렸다. 폭격기 중대장으로 진주만 공격에 참가해, 최근 수십년 간 계속 식전에 출석했던 아베 센지( )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올 4월에 90세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베() 씨는 미국과 일본의 전사자들을 추도하기 위해서, 나팔병이었던 해병 대원 리처드 피스크 씨에게 부탁을 해, 매월 2송이의 장미를 진주만과 태평양 국립 기념 묘지에 헌화하고 있었다. 피스크 씨는 진주만에서 공격을 받은 측이었지만, 군인들의 화해를 호소하는 아베 씨에게 공감하여, 헌화와 함께 진혼의 나팔을 불었다. 이 이야기는 하와이에서는 유명한 얘기로, 그림책으로도 만들어 졌다. 피스크 씨도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올해 추도식에는 아베씨를 대신에 딸, 신 나오미( ) 씨(63)와 남편 교지() 씨(65)의 모습이 보였다. 교지씨는 생전에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난 것은 서로가 상대를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고 말하며, 고인의 뜻을 이어 체력이 계속 되는 한 추도식에 참가하겠다고 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1941 년 12월 8일부터 45년 8월 15일까지. 일본 대 미국, 영국, 중국 등의 연합국과의 전쟁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의 일환이며, 일본의 입장에서는1937년부터 시작된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의 결착과도 얽힌 전쟁이었다.

일본 시간으로 12월 8일(하와이에서는 7일 아침), 하와이 진주만 공격이 전쟁의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1시간 정도 더 빨랐던 영국령 말레이 반도의 코타발 상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전쟁의 목적은 자급자족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무력으로 제압하여 석유 등의 여러 가지 자원을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영국령 등을 공격하면 미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태평양 측의 거점을 공격하였다.

전쟁은 1945년 8월의 히로시마(広)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와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이 연합국 측의 포츠담 선언에 의한 항복 권고를 받아 들임으로써 종결되었다. 일본 역사상, 최대의 참화를 가져온 것은 물론이고, 아시아 태평양에서도 큰 희생을 치렀다. 군인과 일반 국민들을 포함한 일본의 사망자 수는 약 31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외지에서의 생사 불명자와 원폭을 포함한 공중 폭격으로 사망한 수가 뚜렷하지 않아, 사실상의 피해자는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의 이름 전쟁이 시작된 2일 후, 일본 정부는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에서 이번 전쟁을 대동아(亜) 전쟁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시나 사변(変)이라던 중일 전쟁도 포함한다고 밝혔다.

이 명칭은 점령 후, 연합국 군 총사령부(GHQ)의 지령으로 공문서에 사용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후 미국 측이 사용하고 있던 태평양전쟁이라는 호칭이 점차 정착했다. 이번 역사는 살아 있다시리즈에서는 중일 전쟁과의 중복 등을 피하고, 전쟁의 성격을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고 칭했다.

지식인 20명에 듣는다--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 대 사건은? (13)

미타니 히로시() 도쿄()대학 교수

한류 붐, 예전에 없었던 구조 변동

역사의 분기점에 주목했다. 처음 4가지는 우리의 시선이 어떤 영향 하에 놓여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또한, 동아시아는 근대화를 강제 당했다는 특징이 있다. 각 국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던 시기가 다르다는 것이 큰 문제를 일으켰다. 일본에 의한 이웃 국가의 침략은 근대화의 시간적 차이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첫 번째로 동아시아의 인적 교류가 급진전한 것과 냉전 종결을 들고자 한다. 1990년대 이래, 동아시아에서는 사람들의 상호 방문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한류 붐과 같이, 많은 서민들이 이웃 나라를 직접 알게 된 것은 동아시아가 시작된 이래의 구조 변동이다. 또한, 냉전 종결은 국가 간 뿐만이 아니라, 각 국의 내부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그것은 새로운 인적 관계의 가능성을 여는 한편, 냉전 하에서 억압되었던 좋지 않은 기억들을 떠올리게도 하였다.

3번째로는 1880년대 전반의 동아시아 3국의 협조를 지적하고 싶다. 동아시아의 역사는 대립한 측면 만이 이야기되기 쉽상이지만, 그렇지 않은 시대도 있었다.

도쿄()의 중국 공사관에 있었던 황쭌씨엔(黄)이 쓴조선 책략이라는 팜플렛에서는, 조선의 자강(強)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일본과 제휴하고, 더 나아가 미국과도 국교를 열 것을 주장했다. 원래는 일본의 외무경(오늘날의 외무장관)인 데라시마 무네노리( )의 생각으로, 조선 국왕은 이를 채용하여 2년 후에 미국과 조약을 맺고 국내 개혁을 시작하였다.

4번째로는 대일본제국의 붕괴이다. 일본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에 점령되었다. 끊임없이 전쟁을 하는 체제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그 정신적 트라우마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근린 사정에도 눈을 돌려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없어졌지만, 중국에서는 국공 내전이 격화되고, 조선반도(한반도)도 남북으로 분단되어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평화를 찾았지만, 이웃 나라들은 그 후에도 전쟁에 시달렸다. 우리 일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아 두는 것이 좋다.

5, 6번째로는 아편 전쟁과 페리 내항이다. 중국은 서양과 전쟁을 했지만 본격적 개혁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일본은 전쟁을 피하면서 연이어 국내 개혁에 관심을 집중했다. 희박한 국제 관계 속에서 자고 있던 나라가, 갑자기 아주 활동적이고, 게다가 팽창적인 존재로 급변해 갔다.

7번째는 청일 전쟁이다. 일본에서는 러일 전쟁이 자주 위대한 전쟁으로서 상기되지만, 후세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분기점으로서는 청일 전쟁이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근린으로의 팽창은 가능한 것이고, 일단 손에 넣은 식민지는 놓칠 수 없다고 굳게 마음먹고 시작한 것이 청일 전쟁이었다.

8번째와 9번째는 대한제국과 신해 혁명이다. 일본에 이어 조선에서, 그리고 중국에서 내셔널리즘에 의한 개혁과 혁명이 일어났다. 이 내셔널리즘을 다수파의 일본인이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 새로운 불행을 가져왔다.

10번째는 중일 전쟁이다. 중일 전쟁에서 일본이 자멸의 길을 헤맸기 때문에 만주(満)국은 사라지고, 조선도 독립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중일 전쟁이 없었더라면 조선은 독립을 위해서 상당한 희생을 치루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 서민들 속에 내셔널리즘이 침투한 것은 항일 전쟁의 와중이었다고 한다.

인터뷰:사토 가즈오()

약력

1950 년 생. 일본 근대사가 전문이지만 교과서 문제에도 정통하다. 리우 지에() 와세다 대학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과 함께 국경을 넘는 역사 인식 일중 대화의 시도를 일본과 중국에서 동시에 출판했다.

리스트

동아시아에서의 인적 교류의 급진전과 냉전 종결

1880년대 전반의 동아시아 3국의 협조

대일본제국의 붕괴

아편 전쟁과 페리 내항

청일 전쟁

대한제국과 신해 혁명

중일 전쟁

교과서를 비교한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히로시마(広)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면서, 인류를 핵의 시대로 몰고 갔다. 동시에 제국 일본의 패배는 아시아에 대변동을 가져 왔다. 동아시아의 중학생용 역사 교과서에서는 어디에 역점을 두고 설명하는지 알아보자.

일본 국민들과 아시아에서의 희생은 간략하게

일본 중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새로운 사회 역사(도쿄 서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과 아시아라는 제목으로 6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유럽에서의 전쟁을 설명한 후에 아시아∙태평양에서의 전쟁과 전쟁의 종결에 대해 각 2페이지를 할애하였다.

아시아, 태평양에서의 전쟁에서는 학도병 동원과 공습, 피난 등을 다루면서 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의 피해 상황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지만, 합해서 1페이지 정도의 간략한 내용이다.

일본이 침략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는 전쟁터에서 죽거나 노동에 끌려나오는 등,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일반인이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일본에 끌려 와서 자신의 의사와는 반대로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등도 있었으며, 가혹한 노동 조건과 저임금 등으로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동 출판사의 10년 전 교과서에서는, 공습에 고난을 받는 일본 국민의 전시 하의 생활에 대해 2페이지 정도로 기술하고, 강제 노동과 강제 연행, 일본군 위안부 등 아시아에서의 가해 행위를 약 3페이지에 걸쳐서 구체적으로 설명했지만, 그러한 상세한 기술은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오키나와전(縄戦)에 대해서도 10년 전의 교과서에서는 스파이 혐의라는 이유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 집단 자결을 했다등의 주민 피해에 대해 구체적인 기술이 있었지만, 현재는 많은 희생자를 냈다등의 표현으로 바뀌었다.

와타나베 노리오(辺) 사회 편집부장은 학습 지도 요령이 바뀌어서 수업 시간이 줄어든 관계로, 내용을 엄선한 것과 좌우 양 페이지의 분량을 1시간 수업 분량으로 구성한 점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도 부정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1997년에 개정된 7개 사의 교과서는 모두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다. 그 이후 그 기술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이 발족되었다. 그리고 그 단체 등에서 주장하는 기술이 너무 자학적이다라는 비판의 영향을 받아 교과서 내용이 오늘날처럼 되었다.

오오쿠보 마키(真)

한국 광복군의 분투하는 모습을 2페이지에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는 세계사 분야에 속하는 사회 2와, 한국사를 다루는 국정 교과서 국사 양쪽 다 가르치고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금성 출판의 사회 2에서는 제2차 대전 경과를,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부터 원폭 투하에 이르기까지 2페이지에 걸쳐 그림과 사진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일본군, 인도차이나 침공과 일본의 진주만 기습등의 항목을 두어 사실 관계를 적는다.

집필자가 취재에 응해 준 도서 출판 디딤돌의사회 2에서는 히로시마(広)에서 피폭을 당한 중학생의 수기를 소개하고 있다. 김육훈(勲) 태릉고교 교사는 핵병기가 얼마나 무서운가 한국인은 잘 모른다. 침략한 나라도 침략 당한 나라에서도, 민중에게 전쟁이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가르치려 한다고 집필 의도를 말했다.

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에 있던 대한 민국 임시 정부에 의해 조직된 한국 광복군의 분투에 대해 2페이지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함께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이 때, 한국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며, 멀리 인도와 미얀마(버마) 전선에까지 나아가 영국군과 함께 대일 전투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적극적인 독립 전쟁은 여러 나라에 알려져, 세계 열강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모인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라고 기술하며 광복군의 투쟁이 독립에 기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허영란() 박사는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가 전황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는가는 둘째 치고, 식민지였던 조선이 전승국이 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우익들은 일본이 미국에 진 것이지, 식민지 조선에 진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 전개하는데, 이에 대한 비판의 의미도 있다고 했다.

사쿠라이 이즈미(桜)

중국 파시즘 국가와의 싸움 강조

중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인민 교육 출판사의 중학생용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대 미영() 전쟁에 대해 세계사교과서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다루고 있다. 이 단원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세계 반 파시즘 전쟁의 승리라는 두 개의 과로 구성되어, 14페이지에 달한다. 이 안에서 진주만 공격 등 일본에 관한 부분은 합계 2페이지 반이 할애된다. 다음과 같은 기술로 시작된다.

1941년 12월 7일 새벽, 일본군은 대량의 비행기를 출동시켜, 선전 포고도 없이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다음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의 규모가 더 한층 확대되어, 세계 대부분의 지역과 사람들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한 피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일본 교과서와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다른 특징은,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전체주의) 국가 진영과 반파시즘 국가 진영의 싸움이라는 성격을 부여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파시즘 국가의 야만스러운 침략은 세계 인민의 광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미국, 영국, 소련 등의 국가들이 공동의 적인 파시즘에 저항하기 위해 손을 잡게 되었다.

아시아와 태평양의 전장에서는 일본은 항복을 거부했다. 중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민들은 일본 침략자에 대해 맹렬한 반격을 했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를 잘 아는 또완뤼총() 게이오대학 준교수는 중국 정부는 항일 전쟁이 반파시즘 전쟁의 승리에 공헌하였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향상으로 연결되었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게재하여, 학생들 스스로가 사고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자이다, 라는 견해가 일본에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토 가즈오

대만 얄타 회담의 중요성을 지적

대만의 교과서에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중국사와 세계사에서 다루고 있다. 널리 사용되고 있는 남일서국()의 국민 중학∙ 사회의 중국사 부분에서는 중일 전쟁 항목에서 1페이지를 할애하여, 진주만 공격으로부터 원폭 투하까지를 설명하고,중일 전쟁의제2 단계는 (중국이) 연합군과 함께 싸웠다.라고 평가한다.

중국으로서는 큰 의미를 가지는 사항으로서, 카이로 회담과 얄타 회담에 대해 사진을 첨부하여 설명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참가하지 않아 사정을 모르는 가운데, 소련과의 얄타 비밀 협정을 체결해, 중국의 권익을 팔아 버림으로써 중국에게 커다란 손해를 끼쳤다.

세계사 부분에서는 2페이지에 걸친제2차 세계대전항목 안에서, 진주만 기습이 유럽과 아시아의 2 대 전장을 합류시켰다.라며, 세계 지도 위에 미드웨이 해전 등의 주요한 사건을 싣고, 대전의 확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도얄타 회담은 전후 정세에 영향을 주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라고 지적했다. 대전을 총괄하며,전쟁 규모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컸으며, 전 세계가 영향을 받았다. 수천만 명이 죽은 것 외에도 경제적인 손실은 헤아릴 수 없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국민당 정권 하의 역사 과정 표준에 근거한 교과서에서는 세계사에서 제2차 대전에 대해 약 1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었다. 일본 관련으로는 진주만 기습과 히로시마(広)의 원폭 투하, 항복 조인식 등의 3장의 사진을 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또한, 중국사에서는 태평양전쟁 발생 후, 중국의 전장은 일본군 100만 병력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전력을 다해 대미 작전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러한 중국의 공헌은 연합국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요소로 작용 되었다라며, 항일전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남일서국()의 교과서 편집 지도 위원인 초우호이민(恵) 정치대학 역사학부 교수는 수업 시간과도 관계가 있어, 전쟁 부분에 대한 기술은 상당히 적다. 많은 사람들이 대만에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오스트리아인 포로가 있었다는 것 등도 모른다고 현재의 상황을 말했다.

다무라 히로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