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동아일보의 모태()였다. 무단정치 시기 일제는 한국인들에게는 일간신문의 발행을 철저히 금지하다가 민족적 저항에 봉착하자 통치 방식을 이른바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을 허가했다.
31정신은 평화와 비폭력이다. 전국적 조직을 갖춘 체계적인 운동은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발화하여 삼천리 방방곡곡 도시와 산촌에 이르기까지 고루 전개되었으며 해외의 교포들과 열강의 침략 아래 있던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을 격발()하였다.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은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항일 독립이라는 목표가 같고, 전국적 조직이 없는 자발적 민족운동이 그것이다. 두 운동은 독립이라는 목적을 당장에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영향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도 공통된다. 민족의식,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강렬한 투쟁정신을 불러일으키면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도록 했다. 31운동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처지를 널리 알려 그 후의 독립운동을 지원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선전의 자료를 제공하여 독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31운동의 결과로 국외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국내에는 민족을 대표하는 조직이 결성될 수 없었다. 식민지 통치 당국이 허가한 민족적 구심체는 신문사였다. 민족자립의 기초가 되는 민족문화의 향상과 민족자본을 확립하려 하였으나, 이를 결집할 기관이 없었다. 정부가 없는 민족이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언론 출판과 집회 결사의 자유인데 식민지 통치 당국이 이를 허용할 리 없었다. 총독부 치하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신문을 가질 수 있었기에 교육, 문예, 학술, 종교, 실업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인들은 정신적인 구심점에서 소통하고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31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은 때인 1920년 4월 1일에 창간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 기간 억눌려 있던 민족의 울분이 31운동으로 분출하였으나 민족 해방을 위한 새로운 방략()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사회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론도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밀려오는 다양한 사상과 시대 사조()의 영향으로 가치관은 혼돈()되어 있었다. 민족주의만으로 식민통치의 기반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이 싹트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와 같은 각종 사상도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중반까지 사회주의는 서구식 자유주의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대안적 세계관으로 등장하여 민족주의와 합류하는 형태를 띤 운동으로 나타났다. 다양한 사상은 1920년 이후에 출현한 신문과 잡지를 통하여 논의되고 확산되었다.
우리는 전 정력을 경주하여 차제에 민족 백년의 대계를 확립하고 그것이 확립되는 날부터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전 민족적 대분발()을 계획하여야 할 것이다.(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자 사설 민족적 경륜)라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식민 통치기구의 감시도 비례하여 강화되었다. 총독부는 합방 이후에 경무국 고등경찰과가 담당하던 언론 출판 문예 대중예술 등의 감시와 통제 업무를 전문화하여 도서과를 설치(1926년)하고, 독립운동과 사상문제는 고등경찰과가 전담토록 하였다.
31정신을 계승할 사명을 짊어진 신문도 강화되는 일제의 감시와 통제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1920년 7월 12일자 3면에 31운동 지도자 48인의 공판 기사를 실으면서 48인의 얼굴 사진을 전면에 걸쳐 빼곡히 싣는 파격적인 편집을 했다. 또한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 전개한 한글 보급과 농촌 계몽의 브나로드운동, 조선의 노래 제정, 충무공 유적 보존운동, 1920년 창간 직후에 추진한 단군 영정() 현상 모집, 그 이듬해의 백두산 탐험과 같은 사업도 31정신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물산장려운동, 조선민립대학()운동(1923)은 성사되지 못했으나 정부 없는 식민 치하에서 신문이 벌인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광복 이후 정계, 실업계, 학계, 문화계 등 여러 분야에서 동아일보와 일제하의 민간 신문 출신 언론인들이 진출하여 건국과 민주화,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도 31운동의 계승이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정부가 없었던 식민치하에서 독립된 나라에서 일할 인재들이 신문사를 근거지로 삼아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31절을 맞아 그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