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결 전망이 보이던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이 결렬되면서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EU 집행부로서는 다자간 협상을 대신할 양자간 협상을 성사시켜야 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한국은 EU와의 FTA를 통해 국제통상 주도권을 확보하고 한미 FTA 비준을 서두르도록 미국 의회를 압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소수의 핵심 쟁점을 두고 협상이 지체돼 온 한-EU FTA 협상이 양측의 빅딜을 통해 연내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DDA 결렬로 FTA로 이동
한-EU FTA 협상은 올해 안으로 협상을 끝내겠다던 5월의 양측 합의와 달리 최근까지 눈에 띌 만한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당초 EU는 한미 FTA로 한국 시장에 대한 주도권을 미국에 빼앗길 것을 우려해 한국과의 FTA 체결을 서둘렀다. 하지만 한미 FTA 협정문 비준이 늦어지면서 EU 측에 여유가 생긴 것. 게다가 EU 집행부가 DDA 협상을 주도하면서 한국과의 FTA가 통상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측면도 있다.
그러나 7년 만에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던 DDA 협상이 합의안을 마련한 지 4일 만인 29일(현지시간) 결렬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DDA 농산물 및 비농산물 분야의 핵심 쟁점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WTO 주요국 통상각료회의에서 개도국 긴급수입관세(SSM농산물 수입량이 급증하면 추가 관세를 부여하는 제도)의 발동 요건 완화를 놓고 선진국과 개도국 간 의견이 엇갈려 세부원칙에 대한 최종합의에 실패한 것. DDA 협상 내용이 앞으로도 잠정안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시기적으로는 2, 3년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11월),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의 임기 종료(내년 8월), EU 집행부 교체(내년 11월) 및 인도 총선(내년 5월 예상) 등 주요국의 정치 일정에 밀릴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EU 집행부로서는 다자간 협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양자간 협상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부담이 커져 한국과의 FTA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외교통상부의 한 관계자는 한국과의 FTA 협정 체결을 놓고 미국과 EU가 경쟁관계에 있는 만큼 한국으로서는 미국 의회의 한미 FTA 협정문 비준을 압박하기 위해서라도 주도적으로 한-EU FTA 협상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기술표준 등 접점 못 찾는 핵심쟁점
그러나 한-EU FTA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는 양측의 의견이 평행선을 달려온 핵심 쟁점을 해결해야 한다. EU는 한국으로 수출하는 자동차에 대해 안전기준 등 EU의 기술표준을 그대로 적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으로 수출하는 자동차에 한국 기술표준을 적용하면 그만큼 생산비용이 올라간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한국은 한미 FTA에서 미국이 한국으로 수출하는 차량 가운데 한국 판매대수가 6500대 미만인 수입차 제조사에 대해서만 미국 기준을 사용할 수 있게 한 선례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원산지 판정 기준에 대한 이견도 팽팽하다. EU는 이탈리아에서 디자인하고, 동유럽에서 제조해, 독일 회사가 파는 형식의 국가 간 분업을 하더라도 역내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한국은 다른 국가에서 완제품을 만들어 들여오는 역외 분업이 많아 그만큼 관세 감축 대상이 줄어 손해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일정 품목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역외 가공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타협점 도출 위해 대승적으로 나서야
EU는 인구 5억 명에 국내총생산이 14조 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 시장이다. 한국의 주력 수출품에 대해 EU가 비교적 높은 관세를 매겨놓고 있어 수출 확대 효과가 크다.
LG경제연구원 김형주 연구위원은 한-EU FTA는 시장 개방으로 얻는 이득이 일부 품목의 피해 규모보다 훨씬 크다면서 FTA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보호가 아닌 개방이라는 점에서 시장 개방에 무게중심을 두고 전향적으로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정인교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과 EU는 FTA 주도권을 놓고 서로 견제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런 측면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
한편 정부는 인도와의 FTA인 한-인도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협상을 연내 타결하기로 하는 등 다른 국가들과의 양자간 협상에도 적극 나설 방침이다.
안호영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은 30일 정례 브리핑에서 인도와의 10차례 공식 협상을 통해 협정문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으며 현재 잔여 쟁점에 대해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올해 안에 협상 타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곽민영배극인 havefun@donga.com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