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묻힐 뻔한 여성 간호사 34명의 독립운동 활동이 한 중국동포의 노력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행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2007년 한국에 건너와 이화여대 간호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중국동포 김려화 씨(27)는 2년 동안 수집 발굴한 간호사 34명의 독립운동 활동자료를 정리해 최근 발간했다. 대한간호협회의 지원을 받아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은 크게 비밀문서 연락 및 군사정보 정탐(박자혜 임수명 박원경 박혜경 탁명숙 등) 지역사회병원을 중심으로 만세운동 확장(김효순 박인덕 이도신 등) 적십자운동(김오선 김태복 박옥신 윤진수 이정숙 체계복 등) 보건교육 및 계몽운동(박인덕 정종명 한신광 등)으로 나뉜다.
정종명 선생은 비밀리에 독립운동 서류를 전달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17세에 결혼한 그는 2년 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아들과 먹고살기 위해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에 들어갔다. 피고름 묻은 붕대를 매일 빨아야 하는 등 당시 간호사는 힘들고 천하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에 가난한 가정의 여성들이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1919년 약제실 직원을 가장해 근무 중이던 독립운동가 이갑성으로부터 31운동 관련 서류를 몰래 받아 전달하려다가 들켜 문초를 당했다. 이 일을 계기로 병원을 그만두고 산파로 일하게 된 그는 독립운동가가 검거됐다는 소식만 들리면 감옥에 돈과 옷 음식 등을 들여보냈다. 돈이 없으면 집에 있는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기도 했던 그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누이이자 어머니 같은 사람으로 불렸다.
한신광 선생은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행동파였다. 17세 고등학생 때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진주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태극기를 몰래 나눠주면서 만세를 불러 달라고 설득작업을 벌이다 어린 나이에 2개월간 투옥됐다. 그는 1923년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양성소를 졸업한 후 모자보건 산업에 뛰어들었다. 간호사들이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 같은 해 조선간호부협회를 설립하고 임산부와 아동 건강을 위한 강연에 전념했다. 1928년 광주학생운동 때도 서울에서 학생들을 모아 운동을 일으켰다는 혐의로 1년 징역형을 받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의 부인인 박자혜 선생은 조산부양성소를 졸업한 후 1916년부터 산부인과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31운동으로 각 병원에 부상자들이 줄을 잇자 무력감을 느끼고 간우회를 조직해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하자고 설득했다.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도 벌였다. 1919년 더는 일본인들만을 위한 병원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며 베이징 연경대학(현 베이징대)에 들어간 그는 이듬해 신채호 선생을 만나 결혼한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중국동포 김 씨가 간호사들의 독립운동을 발굴해 정리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가였던 증조할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증조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며 조선족 학교를 다녀 말과 글을 알지만 한국역사를 배운 적은 없어 민족적 끈이 없었더라면 도중에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에서 간호대학원에 입학한 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사는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자료 수집에 나섰다.
김 씨는 간호사가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리게 돼서 기쁘다며 앞으로도 추가적인 문헌 발굴을 통해 공개되지 않았던 사실들을 자세히 밝히고 싶다고 말했다.
노지현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