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텅 빈 문학구장에서 만난 김 감독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단, 야구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였다.
7차전이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다.
KIA가 우승했으니 다행스럽기도 하다. 다른 팀과 팬, 언론이 내년부터 SK를 덜 미워할 것 아닌가. 한국시리즈 3연패를 못한 건 아쉽지만 우리 아이들이 인간 능력 이상을 해준 것 같아 대견하다. 막판 19연승에 플레이오프 역전승, 한국시리즈 최종 7차전까지. 이건 SK만이 갖고 있는 능력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포기란 단어는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한 해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팀들은 SK 야구를 얄밉다고들 한다.
자기들이 못한 걸 남이 하면 얄밉게 보인다. 세계 어느 구단도 우리처럼 훈련하는 팀이 없다. 포스트시즌에서 선수들은 주사를 맞으며 경기에 나갔다. 노력할수록 승리에 대한 집착도 강해진다. 노력 안 해본 사람들 눈에는 이런 부분이 얄밉게 보일 것 같다.
SK 야구에 감동을 받았다는 팬도 많지만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며 꺼리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김연아를 예로 들어 보자. 그 선수는 진정한 피와 땀과 노력으로 실수를 줄이고 점점 더 실력이 좋아지고 있다. 그런 게 진정한 프로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내게 야구는 유희가 아니라 죽기 아니면 살기 싸움이다. 올해 SK의 평균자책은 8개 구단 중 1위다. 투수가 좋아서? 전혀 아니다. 나는 지는 경기라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5-0으로 앞선 9회 말 상황에서 투수를 바꾸면 팬들은 욕을 한다. 하지만 인생처럼 야구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반면 스코어가 크게 뒤졌다고 경기를 포기하면 그 경기를 보러온 팬들은 뭐가 되나.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아야 단단한 팀이 된다. 지더라도 상대방이 보기에 징그럽게 져야 한다. 이런 노력을 얄밉다고 하는 것은 아마추어들이나 하는 말이다.
SK 선수들은 그런 팀에서 뛰는 걸 행복하다고 하더라.
팀워크는 분위기가 좋다는 것과는 다르다. 진정한 팀워크는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것이다. 2007, 2008년 우승할 때 김원형은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있었지만 한 경기도 못 나갔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팀을 위해 헌신했다. 올해는 주장 김재현이 잘해줬다.
선수들이 이처럼 하나가 되기가 쉬운 일이 아닌 텐데.
박재홍은 자존심이 강한 선수다. 내가 취임한 뒤 1, 2군을 오르내리게 했으니 기분이 나빴을 거다. 어느 날 번트를 시켰는데 실패했다. 다음에 또 다음에도 실패하더라. 하루는 재홍이가 방문을 두드리더니 저 때문에 졌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진 건 괜찮다. 나는 네가 찾아온 게 반갑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열었던 것 같다.
SK는 정말 무서우리만큼 훈련을 많이 하는 팀이다. 어떤 팀을 만들려고 하는 건가.
투수는 무리하게 훈련을 시키지 않는다. 타자는 정상적으로만 하면 많이 훈련해도 다치지 않는다. 야구는 과정과의 싸움이다. 부딪혀보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10개 중 3개를 치면 잘한다는 게 야구다. 하지만 나머지 7개에 대해선 반성을 해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똑같은 3개의 안타를 쳐도 내용이 바뀐다. 나는 SK를 멤버가 좋은 팀이 아니라 강한 팀으로 만들고 싶다.
에이스 김광현과 주전 포수 박경완이 돌아오면 내년엔 압도적인 전력이 될 것 같다는 전망이 많다.
난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고 그림을 그린다. 포수 출신 감독의 대체적인 사고방식이다. 난 투수 출신인데도 그렇다. 김광현이 페이스를 못 찾을 수도 있고, 전병두가 못 던질 수도 있다. 항상 대비를 해야 한다. 올해 SK가 숱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상황 대처가 빨랐기 때문이다. 특히 구단이 루커스 글로버와 카도쿠라 켄 등 대체 용병을 빨리 구해줬다.
많은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내 논란을 일으키곤 했다. 구단과의 불화설도 들리곤 한다.
김응용 삼성 사장이 현장에 있었다면 내가 그렇게 떠들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바보가 아니라 어떤 반향이 있을 줄 안다. 구단과 상처받는 팬들에게는 미안한 부분이다. 하지만 틀린 것을 틀렸다고 하지 않으면 정의가 없어진다. 구단이 내게 어떤 불만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란 인간은 그냥 놔두면 알아서 한다. 하지만 감독의 특수성을 무시하거나 부하 직원 대하듯이 하면 싸움이 된다. 훈련을 많이 해서 돈을 많이 쓰는 게 불만일 수 있겠다. 하지만 SK는 수십억 원 드는 자유계약선수를 데려온 적도 없고 잡은 적도 없다.
야구 이외의 즐거움이 있는가.
난 야구의 즐거움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골프도 해 봤지만 재미가 없더라. 야구는 간단해 보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면 무궁무진한 매력이 있다. 심지어 술을 마실 때도 머릿속엔 야구 생각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디 하나에 미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난 엄청 행복한 사람이다.
유독 사람이 많이 따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KIA 조범현 감독도 우승 후 고맙다고 하더라. 조 감독은 아들이다. 우리 가족은 우리끼리니까 이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남의 가족이다. 남의 자식 하나가 좌절하면 그 뒤에 있는 몇 사람이 함께 좌절하게 된다. 사실 전지훈련 갔다 와서 3월에 딱 하루 서울 성수동에 있는 내 집에서 잤다. 가끔 집에 갈 때마다 뭐가 이리 많이 바뀌었나 생각에 어색하다. 꼭 남의 집에 온 것 같기도 하고.(웃음)
이헌재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