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또 침묵했다. 주한 일본대사관 창문은 열려 있었지만 고개를 내미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빙빙 돌아가며 대사관 밖을 감시하는 폐쇄회로(CC)TV만이 할머니들을 맞이했다. 할머니들은 오늘도 사죄하라고 다시 외쳤다. 그리고 다음 주에도 또 오겠다고 강조했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는 수요집회가 14일 1000회를 맞았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할머니들은 이날도 어김없이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모여 정오부터 두 시간여 동안 수요집회를 개최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5명과 정대협 관계자, 일반 시민 등 3000여 명이 참석했다.
1000회 맞았지만일본은 또 침묵
일본 대사는 들어라. 평화의 길이 열렸으니 일본 정부에 고하라. 이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사죄하라고. 알겠는가!
마이크를 잡은 김복동 할머니(85)는 대사관을 향해 온 힘을 다해 외치고 한숨을 쉰 뒤 다시 말을 이어갔다. 김 할머니는 우리 국민은 뭉치면 뭐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정부도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엄중히 요구해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길원옥 할머니(84)도 일본인들이 사죄하지 않고 있는데 1000회라고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우울합니다라며 우리 국민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앞으로는 나 같은 사람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당부했다.
경기 오산시 운천고 3학년인 이다미(17), 유혜진 양(18)은 동아일보 기사를 언급하며 초등, 중학생의 76%가 일본군 위안부를 모른다고 한다. 잠깐 동안의 관심이 아니라 할머니들의 활동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자고 외쳤다.
본보 12일자 A10면 참조
일본 NHK와 후지TV, 로스앤젤레스타임스, AP 로이터 EPA통신 등 외국 언론사도 열띤 취재경쟁을 펼쳤다. 외국인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는 등 수요집회에 대한 국제사회의 높은 관심도 그대로 드러났다.
한나라당 정몽준 전 대표, 한명숙 전 국무총리,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 등 정치권 인사들도 참석해 함께 일본 정부를 규탄했다.
평화비도 제막
이날 집회에서는 모금을 통해 제작된 평화비가 대사관 건너편에 예정대로 세워졌다. 제막식이 예정된 낮 12시 20분을 3분여 앞두고는 하늘에서 갑자기 부슬비가 떨어졌지만 평화비를 덮은 막을 내리자 곧바로 비가 그쳤다. 평화비가 모습을 드러내자 할머니들이 옷깃을 여며 눈가를 닦아냈다.
한복을 입은 채 손을 무릎에 모으고 작은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평화비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연행 당시 모습을 형상화했다. 높이는 약 130cm. 옆에는 빈 의자를 하나 뒀다. 소녀를 위로하는 시민들의 자리라고 정대협은 설명했다. 의자 옆 돌바닥에는 수요집회를 설명하는 문구와 평화비의 의미가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새겨졌다.
하지만 후지무라 오사무() 일본 관방장관은 이날 오전 기자회견에서 평화비 설치가 강행된 것은 정말 유감이라며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위안부 평화비 철거를 요구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수요집회와 평화비 건립과 관련해 무토 마사토시() 주한 일본대사가 이날 오후 외교통상부에 들러 이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 당국자는 당사국(일본)이 협조 요구를 하면 접수국(한국) 입장에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며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방치한 일본 정부의 설득력 없는 태도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김태웅 배극인 pibak@donga.com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