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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달려온 불안 행렬 낮 12시도 안돼 대기표 1000번

새벽부터 달려온 불안 행렬 낮 12시도 안돼 대기표 1000번

Posted May. 05, 2012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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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표를 뽑지 않고 돈을 가져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금융당국을 믿지 맙시다. 우리가 스스로 적발해 내야 합니다.

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S저축은행 본점. 40대 남성이 창구 앞으로 나오더니 이날 몰려든 수백 명의 고객에게 이렇게 외쳤다. 지난해 영업정지된 부산저축은행의 VIP 고객과 임원진에 대한 특혜인출 사건을 떠올리며 한 발언이었다.

금융당국의 3차 저축은행 영업정지 발표가 임박한 이날 퇴출 대상으로 지목된 3, 4곳의 저축은행 지점에 몰려든 고객들은 모두 격앙된 표정이었다. 고객과 직원 간에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도 벌어졌다. 일부 지점에서는 이날 낮 12시가 되기도 전에 번호표가 1000번을 훌쩍 넘어섰다. 은행 문을 열지도 않은 새벽부터 긴 줄이 늘어섰고 미처 객장 안에 들어가지 못한 고객들은 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무작정 기다렸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이날 하루 영업정지 대상으로 거론된 5곳(계열사 1곳 포함)의 저축은행에서 빠져나간 예금액만 총 40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저축은행에선 3일에도 1618억 원이 인출돼 이틀 동안 인출액은 약 6000억 원에 이르렀다. 영업정지 발표가 있기도 전에 사실상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뱅크런)가 현실화된 것이다.

자제 요청 안통해

서울 중구 을지로 S저축은행 지점은 오전부터 고객들이 밀려들자 아예 정문 출입구의 철제문을 내리고 번호표를 받은 사람들만 비상구를 통해 드나들게 했다. 고객들은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 맡긴 돈은 어떻게 되는 거냐며 직원들에게 항의했다. 하지만 굳게 닫힌 출입문에는 창구가 번잡하니 직원들의 통제에 동참해 달라는 안내문만 걸려 있었다.

이곳을 찾은 이모 씨(60여)는 노후자금으로 6000만 원 넘게 예금했는데 불안해 죽겠다. 오늘 인출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직원들은 아직 (퇴출 은행이) 발표된 게 아니다. 5000만 원 이하의 예금액은 모두 보장된다며 고객들을 안심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저축은행은 최근 회장이 한 언론 인터뷰에서 퇴출 심사 대상임을 공개적으로 시사하면서 지점을 찾은 고객들이 다른 저축은행들보다 훨씬 많았다.

을지로의 H저축은행 지점에선 오전 11시경 번호표 발급기가 아예 작동을 멈췄다. 대기인원이 300명에 육박하면서 종이가 떨어진 것이다. 한 60대 남성은 기자에게 지난번에도 프라임저축은행에 돈을 맡겼더니 만기 2주 전에 영업정지 발표가 나왔다며 은행 직원들을 못 믿겠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도 다 속이는 것 아니냐. 난 직업도 없고 연금이나 받아먹고 사는데라며 허탈해했다.

5000만 원 초과 예금자들 전전긍긍

지난해 저축은행 사태에 대한 학습 효과 때문인지 이날 지점 현장에서는 5000만 원 초과 예금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고액 예금자들은 오늘이 아니면 돈을 떼일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절박한 모습이었다. S저축은행의 한 시내 지점에서 만난 이모 씨(35)는 1억 원을 예금했는데 조금 전 400번대 표를 받은 아가씨가 자기는 더 못 기다리겠다면서 내게 번호표를 주고 갔다며 기다리다 지쳐 점심 먹으러 집에 들렀는데, 아내가 순번 넘어가면 안 되니까 얼른 먹고 다시 가라고 해 서둘러 왔다고 말했다.

1100만 원을 후순위채에 투자했다는 50대 여성은 3년 전엔 수익률이 좋을 것이란 권유를 받고 샀는데 이런 상황이 올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지점 주변에선 보험사와 증권사 직원들이 출장을 와서 저축은행은 불안하니 우리한테 투자해 보라며 영업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M저축은행의 서대문 지점에선 고객들이 몰려들자 직원들이 창고에서 간이의자를 내놨다. 불안해진 고객들은 초면인데도 삼삼오오 모여 예금자보호제도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았다.

퇴출 명단서 빠진 저축 반사이익

S저축은행은 객장뿐 아니라 온라인에도 사람들이 몰리면서 인터넷뱅킹이 한동안 마비됐다. 이 저축은행에 2000여만 원을 넣은 이모 씨(32여)는 미처 지점에 갈 시간이 없어 인터넷 접속을 시도했지만 계속 에러 메시지만 떴다며 비록 5000만 원이 안 되지만 보험금을 받기까지 절차가 워낙 복잡해 미리 찾아놓아야 하는데 답답하다. 이달이 적금 만기인데 하필 왜 지금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날 증시에서도 일부 상장 저축은행들의 주가가 줄줄이 폭락했다. S저축은행은 전날보다 14.98% 하락한 1135원에 거래를 마치며 이틀 연속 가격 제한폭까지 떨어졌다. H저축은행, 또 이 은행의 계열사인 J저축은행도 이날 각각 하한가로 곤두박질쳤다. 반면 퇴출 명단에서 빠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 다른 저축은행들은 소폭 올라 반사이익을 누렸다.



유성열 박승헌 ryu@donga.com hpark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