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에 스즈키 젠코()라는 총리가 있었다. 11년 전에 타계했지만 그 부인이 최근 작고해 집에 문상을 다녀왔다. 1980년 오히라 마사요시() 총리가 심장병으로 급사하고 대신 총리가 된 사람이 스즈키 씨다. 젊은 정치 기자였던 나는 매일같이 스즈키 자택을 출입하면서 갑작스러운 권력 승계 드라마를 취재했다. 그게 어제 일처럼 생각돼 그리웠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서울에 유학하게 돼 스즈키 총리를 인사차 방문한 1981년 9월, 총리는 입을 열자마자 잡혀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라고 했다. 이게 송별의 말인가 하고 조금 맥이 빠졌지만 그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당시 한국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지 1년 남짓. 사형수가 된 김대중 씨는 형무소에 수감됐고 그 사이 일본 신문사 지국은 잇달아 폐쇄됐다. 기자들에게는 강제 퇴거 명령이 내려지는 등 보도 탄압이 두드러졌다. 스즈키 총리는 나의 신변을 걱정하는 한편 성가신 외교 문제를 일으켜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년간 나는 무사히 서울 생활을 보냈다. 거동이 수상하다고 간첩으로 신고된 적이 있었지만 오해는 곧 풀렸고 스즈키 총리를 걱정시킬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씨의 신변은 스즈키 총리를 계속 고민스럽게 했다. 1982년 1월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나중에 치료 명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지만 그때까지 미국과 함께 한국에 강하게 손을 쓴 것은 스즈키 정권이었다. 김대중 씨는 1973년 도쿄에서 일어난 납치 사건 피해자였기 때문에 일본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한편 1982년 6월에 일어난 게 일본의 교과서를 둘러싼 왜곡사건이었다. 고교 역사 교과서가 문부성(현 문부과학성) 검정에 의해 침략과 식민지의 과거사를 미화했다고 한국과 중국에서 큰 문제가 됐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매일 신문과 TV를 장식하는 왜곡이라는 말에 마치 내가 비난받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애를 먹은 것도 스즈키 정권이었다. 결국 미야자와 기이치() 관방장관(나중에 총리)이 담화를 내고 근현대사 교과서에 인근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조를 배려하겠다고 약속하고서야 수습됐다.
생각해보면 당시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17년이나 지난 때였지만 양국 관계에는 부자연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같은 자유 진영이라고 하지만 한쪽은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군사 독재 정권이고 다른 한쪽은 식민지 시대에 대한 반성이 부족한 옛 지배국이었다. 조약 체결 이후의 이런 모순에 새삼 고생한 것이 스즈키 총리였다.
그때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민주화된 지 오래인 한국과 총리의 사죄를 거듭한 후의 일본인 만큼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는데도 최근 한일 관계는 어딘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우선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기소된 점이다. 예전의 긴장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해도 보도의 자유에 대한 정권의 압력은 스즈키 총리가 내게 하던 걱정을 생각나게 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과 기본적 가치관을 공유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을 정도다.
한편으로 지금의 역사 인식을 둘러싼 대립은 역사 교과서 사건 시절을 연상시킨다. 1990년대에 진행된 사죄와 화해의 움직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이 문제는 아베 신조() 총리에게 큰 책임이 있을 것이다.
그 시절에 비하면 국민 간의 관계는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하지만 지금이 오히려 골치 아픈 것은 정권 간의 불신이 큰 때문이다. 스즈키 정권은 어떻게든 역사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한편으로 전두환 정권은 반일 이용에서 제어로 전환했다. 스즈키 정권의 뒤를 이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전격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단번에 관계를 개선시키더니 곧이어 전두환 대통령을 국빈으로 일본에 초대했다.
그 시절은 엄중한 냉전의 시대였으며 한국은 소련과 중국을 두려워했다. 그런 동아시아 상황이 지금 전혀 달라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만으로 한일 간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너무도 무정하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50주년까지 앞으로 두 달. 엊그제 산케이신문 지국장의 출국이 8개월 만에 허용된 것이 양국의 해빙으로 이어질 것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