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이종일이 만든 최초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이종일이 만든 최초의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Posted June. 02, 2018 07:59   

Updated June. 02, 2018 07:59

中文

 1919년 3월 1일 경성의 독립운동 현장에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또 다른 유인물이 등장했다. 일반 신문의 호외판 크기로 ‘조선독립신문’이란 제호가 새겨진 신문이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최초의 지하신문이자 민족 언론이었다. 

  ‘조선독립신문’의 창간을 주도한 이는 이종일이었다. ‘제국신문’을 경영한 언론인 출신인 그는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찍어내는 한편으로 비밀리에 ‘조선독립신문’ 1만 부를 따로 발행했다. 자신은 33인의 민족대표로 체포돼 수감될 것이기 때문에 보성상업전문학교 교장 윤익선을 신문사 사장으로 내세웠다.(윤익선에 대한 1차 경찰신문조서)

  ‘조선건국(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자로 창간된 이 신문은 독립선언의 취지를 전 민족에게 알리고, 3·1운동의 전개 상황을 신속 보도하는 등으로 독립운동을 전국에 확산시키려는 목적으로 배포됐다. 신문은 3월 1일 당일 탑동공원에서 약 4000부가 뿌려졌고, 천도교 청년들과 각 학교 학생들을 통해 일반 가정에도 배달됐다. 제2호(3월 2일자)에서는 “근일(近日) 중에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를 조직하고 가대통령(임시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도 전했다.

 신문은 주로 구금된 민족대표자들의 소식, 전국에 걸쳐 일어난 독립운동 상황, 운동을 지지하는 해외 소식, 일경의 잔인한 행패 등을 게재했다. 신문은 일제의 그악스러운 탄압 속에서도 그해 4월 말 27호가 발간되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 5월 이후 8월 사이에도 발행인을 밝히지 않는 등 부정기적으로 10호가 추가 발행됐다. 

 민족 언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조선독립신문’의 출현을 계기로 국내외 곳곳에서 지하신문들이 등장했다. 그해, 중국 상하이에서는 이광수가 8월 21일 사장을 맡아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10월 28일에는 신채호가 주도한 ‘신대한’이 창간됐다. 이들 신문도 국내로 유입됐다. 총독부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 외에 일체의 신문 발행을 원천 봉쇄해왔던 일제는 지하신문을 억누르려 했으나 곧 한계에 부딪쳤다. 결국 일제 총독부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해 신문발행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가 창간된 배경이다.


안영배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