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 말기는 시문학사에서 취약한 시기다. 열강의 침략 속에 전통과 근대가 충돌했고, 전통에 속하는 것들이 허물어진 탓이다. 고종 시대 문단과 문인의 활동상이 담긴 사료도 다른 어떤 시기보다 부족했다. ‘용등시화(榕燈詩話)’의 가치는 그래서 크다.
저명한 시인이자 관료였던 무정 정만조(1858∼1936)가 을미사변에 연루돼 유배된 전남 진도에서 1906년경 이 비평집을 완성했다. 제목 그대로, 용나무 창가 호롱불 아래서 쓴 시화다. 193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문화면에 실린 ‘용등시화’를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와 김보성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지난해 10월 찾아내 현대어로 옮겼다.
정만조는 조선 시문학이 18세기 이후 쇠퇴해 말기에 그 명맥이 끊어졌다는 기존 시각을 거부한다. 19세기 초 활약한 한시사가(漢詩四家·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이 이전과 다른 시풍을 통해 시문학의 계승과 발전을 이뤘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용등시화는 고종 시대 시단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거의 유일한 사료”라고 평가한다. 강위, 황현 등 당대 주요 작가와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시가 실려 있다. 흥선대원군, 김홍집, 유길준 등의 시와 그에 얽힌 일화도 담았다.
서울 남산의 북쪽 지역인 회현방(會賢坊)을 중심으로 시를 창작한 시사(詩社) ‘남사(南社)’의 활동도 풍성하게 보여준다. 언급한 인물들의 활동은 독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얻은 게 아니라 정만조가 직접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정만조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제대 강사, 조선사편수회 위원 등을 지내며 친일 행적을 이어갔다. 안 교수는 “친일 행적은 그것대로 평가해야 한다”며 “조선 말기 시단과 지성계, 정치계를 깊이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우수한 저서로 활용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