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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구미코

Posted June. 19, 2019 07:33   

Updated June. 19, 201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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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들은 종종 다른 예술가들의 것을 빌려 창조적으로 전유한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원작자인 다나베 세이코도 그렇다. 그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을 빌려 장애와 관련한 속 깊은 사유를 펼쳐 보인다. 사강의 소설에 나오는 조제는 젊고 부유하고 거칠 것이 없는 스물다섯 살의 여성이다. 비슷한 나이라는 걸 제외하면 다나베의 소설에서 조제라 불리는, 하반신 마비에 생활보호대상자인 구미코와 비슷한 점이 없어 보이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 구미코가 조제로 불리기를 바라는 것은 조제처럼 당당하고 싶어서다.

 실제로 구미코는 장애인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당당하다. 그는 장애인이라면 무조건 불완전한 존재로 보고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부터 들이미는 사람들의 눈, 그 눈이 주는 상처와 모멸감이 싫다. 다소 과장되게 고압적이고 날이 선 자세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이유다. 자신의 곁을 우연히 지키게 된 남자친구에게는 특히 그렇다. 사랑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여야 한다는 논리다. 그는 남자친구가 언젠가 자신의 곁을 떠날지 알 수 없지만 그 이별마저도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생각한다. 장애가 자신을 포함한 누구의 발목도 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다짐이다. 놀라운 자존감이다. 동물원 호랑이의 무서운 눈을 보고 남자친구의 품에 안기는 것도, 수족관 물고기들을 보면서 마냥 행복해하는 것도 그 자존감이 있어서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방향은 달라도, 자신의 젊음을 맹목적 사랑에 내어준 사강의 조제와 비슷한 면이 있다.

 조제, 아니 구미코는 연민이나 동정의 대상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행동과 사고, 삶의 주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장애보다 인간성이 먼저고 장애인이기 전에 개별적 인격체라는 무언의 선언인 셈이다. 연민이나 동정의 한계에 주목하면서 이보다 더 깊고 따뜻하게 장애와 관련된 사유를 펼치기도 힘들다.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김성경기자 tjdrud030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