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지금쯤 호주 동북부 바다 아래에는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한 게 껍데기 무더기가 생겨났을 것이다. 거대한 산처럼 쌓인 이 무더기는 불과 한 달 전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혹시 누군가 바다에 몰래 버린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매년 20만 개가 넘는 껍데기가 쌓이는 까닭이다. 시간도 일정하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인 11월 초·중순 첫 보름달이 뜰 때다. 이 거대한 산을 만드는 주인공은 거미처럼 다리가 긴 거미게라는 녀석들이다.
평소 깊은 바닷속에서 따로따로 살아가는 녀석들이 어떻게 시간을 맞춰 비교적 얕은 바다 한곳에 모이는지는 모르지만, 모이는 이유는 두 가지다. 보통 때는 만나기 어려우니 이렇게라도 해서 짝짓기를 하려는 게 첫 번째 이유다. 대규모 ‘맞선 파티’를 연다고? 그래 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정작 흥미로운 건 두 번째 이유다. 알다시피 녀석들은 포식자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단단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쉽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갑옷은 단단할수록 좋다. 그러나 단단함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몸을 키워야 짝짓기 상대에게도 좀 더 우람하게 보일 수 있고, 세상을 왕성하게 살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 벗자니 위험하고 입고 있자니 더 이상 클 수가 없다. 이 생존의 딜레마에서 녀석들이 찾아낸 묘안이 ‘한꺼번에’다. 이렇게 모여 동시에 갑옷 버리기 ‘대회’를 여는 것이다. 따로따로 갑옷을 벗는다면 닥쳐오는 위험을 고스란히 혼자 받을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하면 일부만 희생하면 되는 까닭이다. 포식자들이 무한정 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다들 같이 모여, 그동안 자신을 지켜주었지만 갑갑했던 갑옷을 한꺼번에 벗어던지고, 속에서 돋아나는 새 갑옷으로 갈아입으니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 축제일까 싶지만, 사실 녀석들에게는 이때만큼 위험한 시간도 없다.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던지고 난 후 새 껍데기가 굳어지기까지 며칠이 걸리는 까닭이다. 이 거대한 만찬 기회를 가오리 같은 포식자들이 가만히 놔둘까? 이게 웬 떡이냐는 듯 축제를 벌인다. 이런 위기를 피하기 위해 거미게들은 가운데로 몰려들고, 그렇게 자기들도 모르게 거대한 산을 만든다.
이 스릴 넘치는 며칠간의 축제 아닌 축제가 끝나면 거미게들은 튼튼한 새 갑옷을 갖춰 입고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긴 하지만 더 성장할 수 없게 하는 갑옷을 벗어던져야 더 클 수 있다는 생존의 지혜를 되새기면서 말이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다. 이 적응하는 힘은 그냥 생겨나는 법이 없다. 거미게들이 잘 알고 있듯 지금까지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 걸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새로운 걸 만들어내야 한다. 제아무리 좋은 것도 지금 쥐고 있는 걸 놓지 않으면 잡을 수 없는 까닭이다. 연말이다. 새로운 걸 얻기 위해 낡은 걸 버리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