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명의 누님들이 해녀였어요. 어릴 때부터 물질하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배운 겁니다. 10대 후반부터는 바깥물질을 다녔습니다. 2월 말에 뭍으로 나가서 추석이 지나 제주로 돌아왔어요. 육지 해안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돈으로 가족을 부양한 거죠. 셋째, 넷째 누님은 70대 중후반인데 지금도 물질을 합니다. 누님들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옵니다.”
70세의 고 씨 노인은 무거운 빚을 지고 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누나들의 희생으로 자신이 교육 받을 수 있었기에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제주 구좌읍 출신인 노인은 경찰이 된 후 40여 년을 부산에서 살았다. 퇴임 후 줄곧 제주 출향해녀문화 전승과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누나들의 바깥물질 행적을 따라 울산 방어진, 포항 구룡포, 통영, 삼천포 등 곳곳을 누볐고, 부산 영도해녀문화전시관이 성공적으로 개관할 수 있도록 도왔다.
고 씨 노인의 누나들처럼 수많은 제주 해녀는 1950∼70년대 바깥물질을 다니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이 시기 수천 명의 제주 해녀는 육지 남성과 결혼해 뭍에 정착했다. 바깥물질은 1910년 이후에 본격화됐다. 제주 해역에서 일본 잠수기선의 남획이 지속되면서 해산물이 고갈됐고, 수산물 상품화에 따른 현금 소득화와 해상 교통수단 발달 등으로 바깥물질 행렬이 이어졌다. 일부는 동력선을 이용했지만, 무동력선인 돛배를 타고 뭍으로 나서기도 했다. 제주에서 출항하여 전남의 신지도를 거쳐서 금당도, 나로도, 돌산도, 거제도, 가덕도 등 섬과 섬을 징검다리 삼아 목적지로 향했다.
필자는 고 씨 노인과 동향인 제주 구좌읍 출신 해녀들이 있는 부산 송도해수욕장을 찾았다. 191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개장한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과 암남공원이라 불리는 송도국가지질공원 사이의 아담한 포구에서 해녀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 씨 할머니(80)는 제주 구좌읍 하도리 출신이다. 바깥물질을 다니면서 송도에 정착했다고 한다. “4형제를 뒀어요. 예전에는 학교에서 부모 직업을 적어오라고 했잖아요. 셋째 아들만 엄마 직업을 해녀라고 적고, 나머지 세 녀석은 빈칸으로 갔어요. 물질하는 걸 드러내기 꺼리던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80세 노인이 제 몸 움직여서 돈 벌 수 있는 직업이 해녀 말고 있겠어요? 물에 들어가면 날아다닙니다. 저기 홍 씨 언니는 83세인데 물속에서는 인어로 변해요”라고 말했다. 옆에서 잠수복을 손질하던 박 씨 할머니(80)는 17세에 물질을 배워 해녀 경력이 64년 됐단다.
한때 100여 명의 해녀가 있었으나, 지금은 5명이 물질을 한다. 이들은 10여 년 전부터 해산물을 함께 채취하고 공동으로 판매해 수익금을 나눈다. “많이 채취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적게 잡는 사람이 있을 건데 갈등이 없냐”고 물었다. 경쟁하지 않고 똑같이 나누는 지금이 행복하다며 막내 해녀 양 씨 할머니(66)가 웃었다. 며칠 후 다시 송도해수욕장을 찾아갔다. 노인들은 인어로 변해 연신 숨비소리(해녀의 휘파람 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바다는 평화로움으로 빛났고, 인어들은 쉴 새 없이 무자맥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