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싸울 때마다 습관처럼 “형한테 이른다”고 한 친구가 있었다. 동네가 작은 탓인지 친구의 형은 없다가도 어느 틈에 바람처럼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서너 살 위의 형 뒤로 숨는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에게 “형 낳아줘”라고 했다가 맞은 친구도 있었는데, 형이 없는 우리들에게 형이란 언제 어떤 일이 닥쳐도 내 말을 들어주고, 지켜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개인이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곳이 국가다. 지난해 4월 진주 아파트 방화사건의 유가족들은 “이번 사건은 수차례 신고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한 국가기관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살인마 안인득의 위험성을 수차례 경찰 등 관계기관에 신고하고, 안인득의 가족조차 관계 당국에 강제입원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후의 보루가 외면한 결과는 참혹했다. 5명이 숨지고 17명이 중경상을 입었는데, 피해자 중의 한 명인 금모 씨는 딸과 어머니가 숨지고 아내는 중상을 입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지난달 26일 팀 감독 등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철인3종 경기 고(故) 최숙현 선수(22)가 6차례나 관련 기관에 진정을 넣었지만 모두 건성으로 대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월 소속 팀을 운영하는 경주시청을 시작해 검찰, 경찰, 관련 체육기관까지 호소했지만 코로나19 핑계를 대는 등 진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 준 곳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최 선수는 생을 마감하기 전날인 지난달 25일에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선수가 마지막까지 살기위해 몸부림을 친 것을 생각하니 안쓰럽기 그지없다.
▷지난 수년간 체육계에서 폭행 성폭력 등 각종 비위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정부는 근절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국회도 빠지지 않는데, 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오늘 전체회의를 열고 진상조사와 강력한 후속대책 마련, 그동안의 대책과 기구가 왜 유명무실했는지 등을 점검한다고 한다. 지난해 1월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 등의 체육계 미투가 터졌을 때 직접 스포츠계 폭행·비리 근절 대책을 발표한 사람이 당시 도종환 문광부 장관(현 국회 문광위원장)이다. 점검이 잘 될지 모르겠다.
▷최 선수가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남긴 말은 “그 사람들의 죄를 밝혀줘”였다. 엄마가 무슨 힘이 있으랴 만은 국가기관에 외면 받은 20대 청년이 마지막으로 호소할 곳이 가족 외에 달리 있을까. ‘그 사람들의 죄’에 왠지, 가해자뿐만 아니라 절박한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까지 포함된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이 아프다.
이진구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