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계 모든 학문을 통달한 노(老)학자 파우스트. 우주를 꿰뚫는 진리를 얻으면 인간 세상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자부했지만, 그는 이내 허무주의에 빠진다. 악마 메피스토는 부유하는 그의 영혼에 은밀히 접근해 속삭인다. 당신에게 열정을 줄 테니 내게 영혼을 팔라고. “계약할까요?”라는 제안에 파우스트는 답한다. “좋다!” 신은 과연 ‘김성녀 파우스트’에게 구원의 기회를 줄까.
‘마당놀이의 여왕’ 김성녀(71)가 26일 개막하는 국립극단의 신작 ‘파우스트 엔딩’에서 파우스트 박사로 돌아온다. 신작 무대는 약 4년 만이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파우스트 배역을 여성이 맡아 주목을 받고 있다. 8일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에서 만난 그는 “여성 배우가 보기에 파우스트는 참 탐나는 역할이었다. 연기 인생 30여 년 만에 기회가 왔다”며 “‘여자 파우스트’ 말고 그냥 ‘김성녀 파우스트’로 봐 달라”고 강조했다.
작품은 당초 지난해 4월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연습실에서 그가 어깨 부상을 당한 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 겹치며 무산됐다. 그는 “지난해에는 열정만 넘치던 상태였다면 지금은 차분히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파우스트 박사’에겐 더 나은 상황”이라고 했다.
극은 조광화 연출가가 직접 각색했다. 큰 틀은 유지한 채 괴테의 원작을 115분 분량으로 압축하고 비틀었다. 파우스트 박사는 고뇌하는 장면 외에는 부드럽고 유쾌한 인물로, 메피스토(박완규)는 장난기 넘치는 귀여운 악마로 그렸다. 김성녀는 “고전의 본질만 전한다면 대중과 맞닿는 방법론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며 “조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는 2012년부터 7년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을 맡으며 창(唱)의 본질과 극의 대중성을 동시에 잡은 그의 예술 지론과도 맞닿아 있다.
남성 노학자로 분한 그의 모습이 다소 신기할지 모르지만 그는 사실 남자 배역에 일가견이 있다. “고정관념 깨는 걸 즐긴다”는 그는 과거 마당놀이 ‘홍길동전’에서는 ‘홍길동’을, ‘햄릿’에서는 ‘호레이쇼’를 맡았다. 배에서 우러나오는 발성은 장군의 호령소리 같다가도 이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돌변한다. 1인극에서는 홀로 30여 개 역을 소화하는 변신의 귀재다.
그는 “평생 롤 모델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판소리”라며 “한 작품에서 춘향부터 변 사또까지 모든 걸 소화해야 하는 국악이 제 단단한 연기와 소리의 토대”라고 했다. 이어 “연출가가 보기에 남자 분장이 은근히 잘 어울리는 영향도 있는 것 같다. 나도 무대 위 내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며 웃었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는 카멜레온처럼 늘 변신한다. 연극배우, 마당놀이 여왕, 예술행정가, 교수 등 수식어가 연기 인생만큼이나 쌓였다. 숱하게 변신하면서도 ‘완벽한 연기’라는 소망을 꿈꾸고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연습 중 조금 변화도 생겼다. “파우스트 박사를 보니 꼭 제 인생 같다. 완벽함을 좇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게 인간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원작 희곡과 작품의 가장 큰 차이는 결말이다. 원작에서 파우스트는 신으로부터 구원받지만, 이번 작품에선 신이 준 기회를 거절하고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지옥행을 택한다. 그는 “인간성이 말살된 오늘날, 작품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인간들에게 전하는 일갈”이라고 했다. 극의 마지막 장, 신과 메피스토 앞에 선 ‘김성녀 파우스트’는 외친다.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김기윤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