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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의 자학

Posted November. 17, 2021 07:19   

Updated November. 17, 202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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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류’로 유명한 소설가 채만식이 쓴 ‘민족의 죄인’은 고백소설이다.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인 마흔 넷이었을 때, 즉 짧았던 삶의 말년에 쓴 것이라 더 진실하게 읽히는 잘 짜인 고백소설이랄까.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 조선총독부와 총력연맹은 각 분야 전문가 조선인 200여 명을 모아 미국과 영국을 규탄하고 전쟁을 찬양하는 강연을 시켰다. 소설가였던 화자도 선발됐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명령을 들어야만 “미움을 받지 않고 일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싫어도 자기 발로 나가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 씨알의 사상가 함석헌의 표현대로 해방이 도둑처럼 찾아왔고, 경위야 어떻든 일제에 협력한 일은 두고두고 화자를 괴롭혔다. “한번 살에 묻은 대일 협력의 진흙은 나의 두 다리에 신겨진 불멸의 고무장화였다.”

 아이러니는 해방 후 화자가 조카를 대하는 태도다. 중학교 졸업반인 스무 살짜리 조카가 작은아버지 집에서 공부하겠다고 올라왔다. 학생들은 악질 친일파였던 선생에게 수업을 받지 않겠다며 동맹휴학 중이었다. 그 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학생들을 낙제시키고 학생들 뒤를 밟아 조선말을 쓰면 잡아다 두들겨 팼고, 해방이 된 지금도 일본말로 훈계를 일삼고 있었다. 조카는 아이들의 집단행동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졸업과 입학시험을 핑계로 작은아버지 집으로 올라온 것이다. 화자의 호통이 쏟아졌다. 반장씩이나 되는 놈이 “나서서 주동을 해야 옳지, 뒤로 살며시 빠져? 넌 그러니깐 반역 행위를 한 놈이야. 그 따위로 못날 테거든 진작 죽어 이놈아.”

 그런데 그 자신이 조카처럼 행동했었다. 그래서 그의 호통은 아들처럼 아끼는 조카에 대한 교육이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참회이고 질책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이라고 자학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자학이 그에게는 구원이었다. 한국문학사에서 과거를 그토록 통렬하게 참회하고 깊게 사유한 작가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