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와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영화 ‘비포 선라이즈’ 중
죄책감은 쾌감을 증폭시킨다. 밤에 먹는 라면이 더 맛있고, 시험 기간에 게임이 더 재밌는 이유다. 하면 안 되지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더 큰 쾌감을 주는 것. 삶에는 이런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적지 않다. 이 길티 플레저가 극강에 오를 때가 사랑할 때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죄다. 사랑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기꺼이 허락하기 때문이다. 자기 배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은 자신에게 할 짓은 못 된다. 사랑을 두고 유일하게 공인된 광기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작정 펍에 들어가 공짜로 와인을 받아내고, 와인잔을 훔치고, 한밤중이라지만 공공장소 공원에서 노숙하며 사랑을 나누는 건 일탈이자 광기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모범 시민인 20대 청년 둘이 여행지에서 만나 이런 행동을 했다. 물론 죄책감도 있었다. 그러나 죄책감은 희열을 더 고조시킬 뿐이다.
탈법이 사랑은 아니다. 길티 플레저는 탈법을 넘어 초법적으로 삶의 윤리를 찾게 한다. 사랑으로 자기 삶의 입법자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신에 대해서도 탈종교적으로 사유하게 된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너와 나,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어.” 윤리적인 길티 플레저 연인은 사랑이 너와 나 사이, 너와 나만의 신을 조형하는 일이란 걸 안다.
사랑은 기꺼이 유죄인간이 되게 한다. 사랑스러운 공범자와 이 세계의 부조리를 헤쳐 나가게 한다. 함께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더 사랑이다. 사랑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망해도 된다고 믿는 것이다. 같이 망해도 되겠다 싶은 사람, 함께 망하면 결코 망하지 않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사람, 그가 당신의 연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