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도기 항아리 안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앉아있다. 벌거벗다시피 한 그는 환한 대낮인데도 손에 등불을 들었다. 주변에 모여든 개 네 마리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한눈에 봐도 걸인처럼 보이는 이 남자! 바로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다. 그는 왜 저리 누추한 모습으로 개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까?
이 그림을 그린 장레옹 제롬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아카데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다. 에콜 데 보자르의 3대 교수 중 한 명으로 50대 때는 ‘생존한 가장 유명한 화가’로 불릴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제롬은 이 그림을 교수가 되기 전인 30대 중반에 그렸다.
디오게네스는 ‘키니코스(kynikos)’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다. 그리스어 키니코스는 ‘개 같은’이란 뜻이다. 이들은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를 무시하고 세속적 욕망을 거부하며 간소하게 살면서 자연 속에서 자족하는 삶을 강조했다. 마치 개처럼 말이다. 디오게네스 역시 단 한 벌의 옷과 등, 지팡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지금 그가 대낮인데도 등불을 켠 이유는 정직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표정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그의 유일한 동료인 개들은 ‘우리처럼 정직한 인간은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기야 개만큼 본능에 충실하고 정직한 존재들이 있을까. 밥 주는(베푸는) 사람에겐 꼬리를 흔들고, 나쁜 인간들은 물어버린다. 앞뒤 재지 않고 본능에만 충실하다. 화가는 이 그림을 통해 개처럼 욕심 없이, 순간에 만족하며,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그림 속 철학자와 달리 화가는 부와 명성을 좇았고 이 그림을 그린 3년 후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가 되었다. 40년간 재직하면서 2000명이 넘는 학생을 가르쳤고, 그의 영향력도 국내외로 커졌다. 하지만 인상주의가 대세가 되자 그의 그림은 곧 역사에서 잊혔다. 개 같은 삶을 살았던 철학자와 성공을 좇았던 화가, 둘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