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시인 대숙륜(戴叔倫)의 ‘밭 가는 여인의 노래(女耕田行)’는 여인들이 밭일을 하는 모습을 묘사한 명시다. 가난한 집안의 두 딸이 칼을 갖고 밭을 갈아 곡식을 심고 있다. 그들은 남들이 행여 알아볼까 봐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결혼도 못 한 오빠는 군대에 갔고/작년에는 가축 역병이 돌아 소까지 죽었답니다./그래서 칼로 소를 대신하고 있는 거고요.” 사연을 듣고 시인은 가슴이 아팠다. 게다가 “짝을 찾는 꿩들이/한낮에 언덕에서 점심을 먹는 두 노처녀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북학의(北學議)’를 쓴 박제가(朴齊家)는 이 시가 환기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그는 1798년에 쓴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라는 글에서 이 시를 언급하며 여자들이 밭일을 하는 현실을 얘기했다. 그래도 중국 여자들이 밭일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였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으로 인해 남자들이 징집을 당해 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백 년은 평화의 시기였다. 문제는 과거를 준비한답시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선비들이었다. 그들의 수가 10만 명이 넘었다.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도 농사일을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무리들이 인구의 과반수를 차지한 지 지금 백 년이 되었습니다.” 누가 농사를 지었는가. 머슴으로 부리는 농민들과 자기 처자식들이었다. 소를 먹이고 밭을 갈고 풀을 베고 방아를 찧는 일의 대부분은 규중 아낙네의 몫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마을에서는 다듬이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그로 인해 입을 옷이 없어 몸을 가리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슬픈 현실이었다.
박제가는 그런 상황을 남들이 알까 두렵다며 임금에게 직언했다. “선비들이 농사를 망치는 가장 심각한 존재”이니 그들을 도태시키십시오. 그러나 정조는 그로부터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돌아보면 한심한 역사지만, 그렇게라도 임금에게 직언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아주 조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