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상식과 같은 길을 가다가도 때로는 갈라선다. 정지아 작가의 소설 ‘브라보, 럭키 라이프’는 그 갈라섬에 수반되는 어려움을 펼쳐 보인다.
소설 속의 아버지는 자신이 평생 일해서 마련한 논과 밭을 거의 다 팔아 치웠다. 휴가를 나왔다 귀대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막내아들 때문이다. 의사는 가망이 없으니 인공호흡기를 떼자고 했었다. 의사의 말은 비정하지만 상식의 소리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아들을 살리고 싶었다. 아들은 8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있다가 기적적으로 눈을 떴다.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지도 말을 하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냥 먹고 자기만 했다.
그사이에 가진 것은 다 없어지고 논 하나만 남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놈을 죽이고 나도 따라갈까, 그게 저에게도 나에게도 행복 아닐까.” 그는 술김에 아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조르고 있는 아들의 목울대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아부······.” 13년 만에 처음 듣는 아들의 목소리였다.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아들은 말을 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해도 “생각할 줄 아는 어엿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도 울고 아들도 울었다. 그는 “눈물이 흐르기만 하는 게 아니라 펌프처럼 콸콸 샘솟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다음 날 “마누라보다 아끼는 논”을 미련 없이 팔았고, 나중에는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어 살았다. 그는 아들에게 나타난 아주 작은 변화라도 기적으로 여기며 지난 23년을 살았다. 그러는 동안 다른 자식들에게 소홀히 했음은 물론이다. 빚에 쪼들린 큰아들에게서 이제는 산 자식 죽는 꼴 보게 생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소설은 온전하지 않고 온전해질 가능성이 없다고 버려도 되는 잉여적인 존재란 없다는 것을 환기한다. 그게 윤리다. 상식과는 가는 길이 다른 윤리. 그런데 우리라면 어땠을까. 정지아의 소설들은 늘 이렇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