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타고 피리 불며 마을을 지나는 목동, 농촌을 그린 풍경화 속의 목가적인 광경이다. 이는 각박한 세상살이에 시달리면서 갖은 지혜를 다 짜느라 영혼은 피폐해졌을지언정 심리적으로나마 위로받으려는 이들의 영원한 지향이기도 하다. 시 속에 이런 장면이 등장하는 배경은 다양하다.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은둔의 삶을 사는 이들의 진정한 유유자적이 있는가 하면, 명리를 좇아 아등바등 살면서도 체면치레로 읊어대는 구두선(口頭禪)인 경우도 있다. 또 무능하거나 팔자 사나운 선비들이 세상의 쓰임에서 소외되었을 때 내뱉는 가련한 하소연일 수도 있다. ‘자고로 그 누가 명리를 마다했던가. 여태껏 마음과 말이 서로 어긋났을 뿐’(무명씨, ‘탄세가·嘆世歌’)이라는 시구에서 보듯, 체면과 명분을 중시했던 선비 문화에서는 명리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렸다. 명리 추구가 인간의 보편적 욕망에 가깝다는 걸 인정한다면 유유자적의 꿈을 부단히 되뇐 선비들의 고고(孤高)한 취향도 때로 미심쩍을 수 있다.
시는 시인이 일곱 살 때 즉흥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여유만만한 목동이 명리에 휘둘리는 장안 선비보다 낫다는 것인데, 아직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의 발상치고는 왠지 부자연스럽다. 천진한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어른을 흉내 낸 가식에 가깝다. 그러나 고상한 취향으로 젠체하는 이 조숙한 아이는 후일 소동파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스승과 어깨를 겨룰 만큼 빼어난 문학적 성과를 이루었다. ‘소황(蘇黃)’이라는 칭호가 그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