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생전에 성인으로 추앙받은 이슬람 신학자이자 수피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지금으로 치자면 튀르키예의 코냐에 정착해 살았는데 제자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구르주 카툰도 그의 제자였다. 어느 날 그녀는 장군인 남편의 근무지가 바뀌어 코냐를 떠나 아나톨리아로 가야 했다. 그녀는 스승의 초상화라도 가져가고 싶어 유명한 궁정 화가에게 비밀리에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화가는 루미를 찾아가서 솔직하게 얘기하고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루미는 화가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그러라고 했다. 화가는 기쁜 마음으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다 그리고 보니 실물과 전혀 닮지 않은 게 아닌가. 화가는 당황해서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무 번을 그려도 제대로 된 초상화를 그릴 수 없었다. 화가는 놀라움과 두려움과 경외감을 느꼈다. “성인이 이렇다면 예언자는 얼마나 더하겠는가?”
페르시아 성경이라 불리는 ‘마스나비’에 나오는 이야기는 재현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환기하면서, 이슬람에서 예언자를 어떠한 형식으로든 재현하는 것을 금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어떤 것을 그리거나 새겨 경배하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그것은 우상을 만들거나 섬기지 말라는 계율의 연장으로 이슬람교만이 아니라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가 공유하는 계율이기도 했다. 기독교는 포교 과정에서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이슬람은 그것을 절대적인 법으로 고수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2005년 덴마크의 한 만화가가 예언자 무함마드를 희화화하는 만화를 그려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것은 그 법을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슬람들이 거기에 폭력으로 대응해서는 안 되었지만, 그들이 신성하게 생각하는 예언자를 만화로 그려 도발한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었다. 무엇이든 재현의 대상으로 삼는 시대지만, 때로는 재현하지 않는 것이 타자에 대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