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때 어떤 모임에서 일한 적이 있다. 구성원 대부분이 젊은 부모여서 쉬는 시간이면 육아 이야기를 주로 나눴다. 다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키우던 터라 질문도 하고 하소연도 하면서 위안을 얻었다. 그중 한 친구가 조금 특이했는데, 다른 사람이 아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수첩을 꺼내 들고 와서 이렇게 물었다. “태교 때 어떤 음악을 들려주셨어요?” 상대 부모가 답을 하면 수첩에 받아 적으면서 “이 음악은 들려주지 말아야겠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어떤 현상에 대해 명확하고 단순한 결론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원인으로 지목되면 “이건 좋지 않은 것”이라고 낙인을 찍는다. 수첩을 들고 다니던 이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태교음악 때문이란 근거가 없지 않느냐고 설득해도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전투에서 승리자는 영원한 명장으로, 패배자는 영원한 멍청이로 남는다. 군대 간 대결, 무기 간 대결에서도 손쉽게 이런 낙인을 찍는다. 4차 중동전, 골란고원 전투에서 시리아의 소련제 T-62는 115mm 활강포를 장착하고도 105mm 포에 장갑도 약한 이스라엘군의 영국제 센추리온 탱크에 완패했다. T-62가 센추리온보다 못한 탱크였을까? 그렇게 단언해서는 안 된다. 이 패전에는 탱크 조종술, 전차 승무원의 역량, 지형, 전술능력과 지휘능력 등 다양한 요인이 있다.
그러면 또 묻는다. 세상에 전차는 많은데, 굳이 T-62를 변호할 필요가 있느냐고. 혹시 소련을 좋아하는 건 아니냐고. 이런 식의 사고는 사고력과 분석력을 퇴행시킨다. 우리가 무기를 분석하는 것은 서류상 스펙으로 순위를 매기기 위함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에서 그 무기가 할 수 있는 역량을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다. 스펙은 능력의 바로미터가 아니다. ‘조직이 시도하는 행동에서 어떤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올바른 기준이다. 스펙 또한 목적에 맞게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기계적인 스펙만 늘고 인재는 사장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설정희기자 s24jeongh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