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불탱(掛佛幀·그림으로 그려 걸어 놓은 부처의 모습)에 태극기가 몰래 그려진 까닭은 무엇일까.
대한불교조계종 선원사(전북 남원시)는 사찰 내 명부전에 모셔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에서 항일운동 시기 사용하던 형태의 태극기 그림이 발견됐다고 21일 밝혔다.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과 시왕(十王·죽은 자의 죄업을 심판하는 10명의 대왕)을 그린 그림으로, 태극기는 제6대 왕인 변성대왕의 관모에 그려졌다.
태극기 크기는 가로 8.5cm, 세로 3cm 정도다. 태극의 양은 홍색, 음은 녹색으로 채색됐고, 사방에 건곤감리를 배치했다. 이는 태극기 도안이 정착되기 전 독립운동 시절에 사용되던 태극 문양과 일치한다고 선운사 측은 밝혔다.
제작 시기는 1917년 11월 5∼17일이며, 당대의 학승이자 화엄사 주지였던 진응 스님(1873∼1941)이 제작 전 과정을 주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진응 스님은 일제강점기 우리 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병합시키려는 친일파 승려들의 시도에 맞서 임제종을 설립하고, 조선 불교 수호에 앞장선 인물이다.
조선 후기 변성대왕도는 주로 죄인들이 날카로운 칼 숲에 갇혀 있거나 옥졸이 창으로 죄인을 찌르는 장면 등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칼이나 몽둥이로 남을 괴롭힌 자가 떨어지는 도산(刀山)지옥 또는 검수(劍樹)지옥을 나타낸다. 태극기 연구 전문가인 송명호 전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불화에 태극기가 그려진 것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며 “칼로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일제는 칼로 망해야 한다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어 “1917년 당시는 일제가 탱화 제작 등 모든 예술 행위를 검열했다”며 “처음부터 태극기를 그린 게 아니라 검열이 끝난 뒤 몰래 그려 넣은 것 같다. 지장시왕도 태극기는 독립을 바라는 불교계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