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다스동아일보[동아일보매거진:lets-디자이너와 향수이야기]

디자이너와 향수 이야기

속삭이듯 부드럽고 매혹적인 향

라우라 비아조티의 소토 보체

‘이탈리아 프레타포르테의 여왕’이란 별칭을 단 디자이너 라우라 비아조티. 70년대 초 여성 기성복에서 출발한 그는 현재 남성복, 아동복, 패션 소품 등 35개 품목에 달하는 라이선스 계약으로 전세계에 거대한 패션 왕국을 이루고 있다. 그의 오랜 패션 테마인 ‘여성미’는 바로 그의 향수 이미지이기도 하다.

● 글/계수미기자 ● 자료제공/C.E.O 인터내셔날(3443-2772)

‘이탈리아 프레타포르테의 여왕’이라 불리는 라우라 비아조티가 줄곧 추구해온 것은 가장 여성스런 아름다움이다. 비아조티의 무대는 특별히 새롭거나 기발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여성미’란 오랜 패션 테마를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소화하면서 인기를 지속시켜왔다.

그의 옷을 생각하면 우선 우아하고 드레시한 모습이 떠오르지만 그는 발랄한 소녀, 활동성 강한 커리어우먼, 섹시하게 보이기를 원하는 여성 모두를 자신의 작품 이미지에 포함시켜 왔다.

최근 패션계엔 남성풍, 유니섹스풍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여성스런 옷‘을 고집하고 있다.

라우라 비아조티의 신작 ‘소토 보체.’ 만돌린 모양의 병에 은색의 소리굽쇠(터닝 포크) 모양 뚜껑을 꽂은 용기가 특이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이탈리아에서 프레타포르테의 중심지인 밀라노가 아닌, 로마에 생활의 근거지를 두고 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는 제 어머니의 고향이자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 밀라노는 남성적인 도시죠. 활동의 무대일 수는 있지만 결코 매력적인 곳은 아닙니다.”

그는 1943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는 고고학을 전공했지만 졸업 후 곧바로 로마에서 패션 하우스를 경영하는 어머니 밑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했다. 72년엔 자신의 이름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열었는데,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그의 이름은 곧 패션계에 알려졌고, 그가 보송보송한 캐시미어 의상을 발표했을 때는 <뉴욕타임즈>로부터 ‘캐시미어의 여왕’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남들은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전 아직 따로 휴가 기간을 보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일은 자신의 성장을 점치는 일종의 게임이라 할까요? 어떤 일을 벌여놓았을 때 그 결과가 좋으면 즐거움을 만끽하죠. 곧 다음 단계 일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성실성과 추진력에 힘입어 그의 일은 막힘없이 풀려나갔다. 그는 모든 생활의 요소를 ‘라우라 비아조티’란 하나의 브랜드로 통합시키는 작업을 계획했고 차례로 자신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여자 기성복으로 출발, 남성복, 아동복, 니트웨어, 수영복 핸드백 시계 스카프 등 패션 소품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재 35개 품목에 이르는 라이선스 계약으로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

그는 패션으로 이탈리아의 국제적 명성을 높인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87년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국가 공훈자’로 인정받았다. 92년엔 뉴욕에서 ‘올해의 여성상’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거대한 11세기 옛성에서 살아

사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서둔 비아조티는 80년 로마 근교에 있는 11세기 고성(古城)을 구입해 저택 겸 작업실로 사용해오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옛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을 키워오다가 마침내 꿈을 실현한 것이다. 이 성은 일류 건축가 피에로 핀토가 개축했지만 고풍스런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했다. 수십개의 방에는 고가구와 각종 골동품, 미술품들이 즐비해 비아조티의 취향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 성곽을 둘러싸고 있는 40만여평의 대지 위에는 91년 마르코 시모네 골프 클럽이 완성되었고, 그 다음해에 그는 남녀 골프웨어 컬렉션을 소개했다. 94년엔 이곳에서 이탈리아 골프 오픈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여성미’ ‘고전과 현대미의 조화’에 집착하는 그의 성향은 그가 내놓은 향수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82년 상큼한 꽃향을 표현한 첫번째 향수 ‘플로리 비앙키’ 를 발표한 이래 로마, 라우라, 베네치아, 소토 보체 등 로맨틱한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향수들을 선보여왔다.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향기는 화사한 꽃다발의 이미지를 지녀야 하며 또한 독특해야 합니다. 그 향기는 그가 입고 있는 옷과 마찬가지로 그를 표현해 주니까요.”

그의 향수는 다채로운 빛깔을 띤다. 여러 가지 꽃향기가 마치 스펙트럼처럼 화사하게 펼쳐지는가 하면, 부드럽고 은은한 향취, 또는 섹시하고 관능적인 향취가 각각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다가선다.

85년 선보인 ‘로마’는 ‘클래식’을 테마로 한 향수. 엠버, 무스크 등 오리엔탈 계열의 부드럽고 관능적인 향과 쟈스민, 장미 등 신선한 꽃향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다음해에 발매된 ‘로마 우모’는 지중해 특유의 남성미를 담은 남성 향수다. 샌달우드, 바닐라, 엠버, 무스크 등의 깊이있는 우디-엠버향이 특징.

꿈과 낭만,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물의 도시 베니스는 비아조티에게도 영감을 불어넣어 ‘베네치아’란 이름을 단 향수 두가지를 탄생시켰다. 오리엔탈 계열의 ‘베네치아 레드’와 프루티 플로럴 계열의 ‘베네치아 파스텔로.’ 이들은 베니스의 평화로움과 수면의 반짝임, 영롱한 불빛들을 꿈결같이 달콤한 향으로 담아내고 있다.

라우라 비아조티의 최근 모습. 그는 모스크바 푸시킨 박물관에서 이탈리아 화가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자신의 이름을 단 ‘라우라’는 여성들이 추구하는 온화하면서도 강인한 내면세계, 마음의 평정을 잔잔한 호수 이미지로 그려낸다. 투명한 물방울을 연상케 하는 향수 용기는 환상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소토 보체’는 ‘부드럽게 말하듯’이란 음악용어를 단 비아조티의 신작 향수. 우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와 성숙한 관능미가 미묘한 밸런스를 이루며 부드러우면서도 정열적인 향을 전개해간다.

톱노트는 대만산의 오렌지꽃과 시클라멘의 신선한 향이 조용한 멜로디처럼 흐르며, 미들 노트는 코모로 섬의 튜베로즈, 스페인산의 일랑일랑, 난초, 장미가 조화돼 점차 힘있는 합창곡으로 변해간다. 베이스 노트는 브라질의 태양빛을 듬뿍 받은 헬리오트로프, 샌달우드, 바닐라 등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잔향을 남긴다.

‘소토 보체’의 투명한 용기는 악기 형태(만돌린)를 하고 있으며 용기 뚜껑은 특이하게 소리굽쇠(터닝 포크, 음향 측정이나 악기 조율에 쓰는 U자형 금속막대로 가운데에 끝이 둥근 자루를 달고 있다) 모양을 하고 있어 두드리면 금방이라도 맑고 은은한 소리가 울려퍼질 듯하다. 이 향수는 비아조티 자신에 비유되기도 한다. 패션 작품에선 큰소리와는 거리가 먼, 우아하고 여성스런 분위기를 보여주면서도 실제 일을 할 때는 남자 빰치는 정열과 사업가적 기질로 자신의 거대한 패션 왕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