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닷 컴[양영훈의 테마 여행]

테마 8·남녘의 花信

흐드러진 꽃속에 살어리랏다

매화 산수유 수선화 복사꽃 등
‘눈부신 봄’ 활짝 피워

우수 경칩이 지난 3월에도 꽃소식이 없으면 봄을 실감하기 어렵다. 산천초목은 여전히 살풍경하거니와 이따금 옷섶을 파고드는 꽃샘바람이 여간 맵지 않은 까닭이다. 그래도 화신(花信)은 어김없이 날아든다.
겨울 바람의 끝을 잡고 맨 먼저 꽃을 피우는 봄의 전령은 매화 산수유 수선화 복수초. 매화는 동장군의 기세가 한풀 꺾인 2월 초쯤 이면 이미 제주도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고, 남해안과 남부 지방에서는 2월 하순부터 피기 시작한다. 그러나 개화기가 짧아 양지 바 른 곳이나 낮은 강가에서는 3월 중순쯤이면 꽃잎을 모두 떨군다. 중부지방에서도 매화를 볼 수는 있지만 무리지어 핀 모습은 구경하 기 어렵다.
전남 해남군 마산면 상등리에 있는 보해매실농장과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은 「매화골」로 불릴 만큼 매화나무가 많은 곳.
그러나 개화기가 예년보다 보름쯤 일렀던 올해에는 이미 3월 첫째주를 고비로 매화꽃이 거의 다 지고 말았다.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도 매화가 볼 만하다. 이곳에는 수백년 묵은 늙은 매화나무가 칠십여 그루쯤 있는데, 3월 하순이나 4월 초순이 면 매화의 청아한 꽃빛과 고결한 향기가 경내에 그득하다. 또한 이 절은 영산홍 동백 산수유 목련 벚나무 같은 꽃나무들이 많아 어느 절집보다도 봄의 정취가 매혹적이다.

눈속서 노랗게 피는 복수초, 복장수 상징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경주 남산의 솔숲

수선화는 주로 뜰이나 화분에 심는 관상용 화초. 그러나 2월 초순에서 3월 하순 사이에 제주도에 가면 들에 핀 수선화를 어렵지 않 게 볼 수 있다. 특히 추사 김정희가 9년 동안 적거(謫居)했던 남제주군 대정읍과 산방산 주변의 들에는 잡초처럼 야생하는 수선화 들이 유난히 많다. 귀양살이 내내 고적했던 추사는 모진 눈바람 속에서도 단아한 꽃을 피우는 수선화를 매우 아꼈던 듯하다.
한때 제주도의 봄을 대표하던 유채꽃은 최근 들어 재배면적이 크게 줄었다. 2월초부터 4월말까지 성산 일출봉과 화순 산방산 주변에 노란 유채꽃이 군데군데 눈에 띄기는 하지만 순전히 「촬영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면적도 협소하다. 진도와 해남, 특히 목포와 해남-진도를 잇는 805번과 801번 지방도로 주변에도 유채밭이 많다. 4월 하순이나 5월 초순 쯤 연두빛 보리밭과 어우러져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게 한다.
복수초는 야생화 달력의 첫장이나 둘째장에 단골로 등장하는 꽃. 하얀 눈 속에서 피어나는 노란꽃인데, 미처 봄이 오기도 전에 눈과 얼음 사이에서 꽃망울을 터뜨리기 때문에 눈색이꽃 얼음꽃 얼음새꽃으로 불린다.
눈 속에서 핀다는 점도 매력적이지만, 복수초는 선명한 노란색의 꽃과 짙은 녹색의 잎이 조화를 이뤄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이 밝아지 는 꽃이다. 그래서 꽃말도 「영원한 행복」이다. 또한 복수초는 그 이름처럼 복(福)과 장수(壽)를 기원하는 꽃이라 하여 화분을 새해 선물로 보내기도 한다. 「원단화」(元旦花)라는 복수초의 별칭도 거기서 비롯됐다.
2월 초순 제주도에서 피기 시작하는 복수초는 점차 북상하다가 4월 하순경 강원도 깊은 산골에서 막바지 꽃을 틔운다. 복수초는 지역에 따라 생김새와 생태적 특성이 조금씩 다르다. 제주도에서는 대체로 무리지어 자라지만 내륙의 산중에서는 다른 야생화들 틈바구니에서 한두 그루씩 듬성듬성 자란다.
꽃도 제주도의 것이 더 크고 탐스럽다. 제주도의 제1횡단도로(5·16도로)와 1112번 지방도가 갈리는 삼거리 주변의 숲속에 들어가면 무리지어 노랗게 핀 복수초를 쉽게 볼 수 있다. 이곳의 복수초는 3월 중하순까지도 피지만, 아주 흐린 날이나 밤에는 꽃잎이 닫히기 때문에 활짝 벌어진 꽃부리를 보기 어렵다.

전남 구례 산수유꽃 군락지는 ‘노란 꽃구름’

복수초처럼 꽃빛이 샛노란 산수유꽃은 매화보다 일주일쯤 늦게 핀다. 산수유나무는 재배하기 수월하고 추위에도 강한 편이다. 또 꽃이 아름답고 열매는 귀한 약재로 쓰이기 때문에 어느 지방이나 마을과 민가 주변에 한 두 그루쯤 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산수유의 고장」으로 알려진 전남 구례 지방만큼 산수유나무가 많은 곳은 흔치 않다. 특히 지리산의 만복대 기슭에 자리한 산동면 상위마을에는 거대한 산수유 군락지가 있다. 이곳의 산수유는 3월 초순에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3월 중순이면 절정에 이르는데, 온 마을과 골짜기마다 노란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하다.
이 무렵에는 남원시 주천면 용궁리의 수많은 산수유나무들도 몽실몽실한 꽃을 샛노랗게 피워올린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터 주변에도 산수유나무가 많은데, 활짝 핀 꽃을 감상하려면 4월 중순쯤이 좋다.
벚꽃은 봄에 피는 꽃 중에서도 개화기가 가장 짧다. 수많은 꽃봉오리가 거의 동시에 피고지기 때문에 봄을 실감하기에는 벚꽃만한 것이 없다. 오늘날 벚꽃놀이의 대상은 대부분 왕벚꽃인데, 일본의 국화라고 해서 일부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벚 꽃은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진짜 우리 꽃이다. 일본에는 왕벚나무의 자생지가 전혀 없는 반면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해남 두륜산 등지에서는 자생지가 발견됐다.
봄의 흥취를 호젓히 즐기고자 한다면 벚꽃놀이에는 애시당초 관심을 두지 않는게 좋다. 극심한 인파와 장삿속으로 인해 그나마의 흥 취마저 잃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남 하동의 화개에서 쌍계사 입구까지의 「십리 벚꽃길」은 한번쯤 구경해볼 만하다.
널리 알려진 곳이라 경향 각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지만, 화개천의 맑은 계류와 지리산의 웅자를 바라보며 벚꽃길을 걷다보 면 풍진에 찌든 몸과 마음이 한결 가뿐해진다. 이 십리 벚꽃길은 3월 하순경에 가장 아름답다. 그밖에도 남해대교 부근, 영암 월출 산의 도갑사 입구, 고창의 모양성과 선운사 입구, 김제의 금산사 진입로, 경주의 보문관광단지와 반월성 주변, 전북 완주의 송광사 입구, 강릉시의 경포대 주변 등도 벚꽃 구경을 하기에 좋다.

선운사 동백꽃 봄기운 무르익어야 절정

진달래는 우리 겨레의 정서에 가장 적합하고 친숙한 꽃 중의 하나. 우리나라의 모든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다, 봄 처녀의 연분홍 빛 치마를 닮은 진달래 꽃잎에는 마음이 절로 끌린다. 진달래는 홀로 피어도 보기 좋지만, 경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무리지어 핀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진달래가 많이 피는 산으로는 창녕 화왕산, 여천 영취산, 장흥 천관산, 남해 망운산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화왕산은 4월초쯤이면 산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진달래가 많이 피는 곳이다. 천관산은 기암괴석과 어울린 진달래도 아름답지만, 특히 정상에서 굽어보 는 다도해 경관이 숨막힐 듯한 장관이다.
4월초에 경주 남산의 울창한 솔숲에서 피는 진달래와 5월 중하순경에 한라산에서 무리지어 피어나는 털진달래꽃도 볼 만하다. 한라 산 고원에서 자라는 털진달래는 꽃빛이 핏빛처럼 붉고 선명해 제주도의 피맺힌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꽃빛이 아름답기로는 동백꽃만한게 없다. 동백꽃은 겨울꽃이면서 봄에도 피는데, 노오란 꽃술을 품은 선홍빛 꽃잎이 윤기나는 푸른 잎과 대비되어 더욱 탐스럽고 요염하다. 동백꽃은 대체로 활짝 피지 않고 양가집 규수처럼 수줍은 듯 반쯤만 핀 채 개화를 마친 다. 붉은 꽃잎과 노란 꽃술이 함께 붙은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땅에 떨어지는데, 땅에 떨어진 뒤에도 여전히 자태가 곱다.
그래서 동백숲은 반쯤 꽃이 질 무렵에 가장 볼 만하다. 동백숲에서 쉽게 눈에 띄는 동백새도 눈여겨볼 만하다. 동백새는 동백꽃에서 꿀을 빨아먹는 대신에 벌이나 나비처럼 가루받이를 시켜주는 작은 새인데, 녹황백(綠黃白)의 깃털로 치장된 생김새도 아름답거니와 동백꽃과의 공생관계도 매우 흥미롭다.
제주도와 남해안 지방의 동백은 12월부터 꽃이 피기 시작해 3월 초순쯤이면 대부분 꽃잎을 감춘다. 그러나 같은 남해안 지방에서도 거제도 동부면 학동리의 14번 국도변, 통영시 미륵도의 해안일주도로, 해남 대둔사(대흥사)의 진입로 주변, 강진군 백련사에서는 3 월 하순에도 동백꽃을 볼 수가 있다.
고창 선운사와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을 만큼 연륜이 깊은 동백숲이 있다. 이 두곳의 동백꽃은 봄기운이 무르익어야 절정에 이르기 때문에 「춘백」(春柏)으로도 불린다. 선운사의 동백꽃은 대체로 꽃샘바람이 잦아드는 3월 말쯤 피기 시작해 4월 중하순에 만개하는데, 그 무렵에는 동백연(冬柏燕)이 열린다. 바닷가의 낮은 언덕에 자리잡은 마량리 동백숲은 오랫동안 거센 바닷바람을 맞은 탓에 대부분의 나무들이 위로 크지 못하고 옆으로 가지를 뻗어 둥들둥글하다.

은은한 향기로 여인들 춘정 일으키는 복사꽃

이곳에는 4월말이나 5월초에도 싱싱한 동백꽃이 달려 있다.
과실수의 꽃 중에서 가장 볼 만한 것은 복사꽃이다. 예로부터 이상향(理想鄕)을 상징했던 복사꽃은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집안에 복숭아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한다. 복사꽃이 피면 그 화사한 꽃 색깔과 은은한 향기에 취해 과년한 딸이나 갓 시집 온 며느리의 춘정이 동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복숭아밭은 어느 지방에나 흔하다. 굳이 대규모 복숭아밭이 많은 곳을 꼽는다면 영덕의 34번 국도, 전주와 금산 사 이의 17번 국도, 연기군 서면의 1번 국도 주변을 들 수 있다. 특히 영덕 지방의 복사골이 볼 만한데, 4월 중순이면 영덕읍과 지품 면의 들녘과 산비탈은 온통 도원경으로 탈바꿈한다.
선인들이 즐기던 꽃놀이는 요즈음의 무질서하고도 요란한 꽃놀이와는 사뭇 달랐다. 옛 선비들은 매화 구경를 으뜸으로 쳤다. 그들 은 매화를 즐기며 매화처럼 지조있는 삶을 살고자 했다. 반면 서민들은 한해의 고된 농사일에 앞서 이웃끼리 서로 우의와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로 꽃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유교적 신분 질서와 농경사회가 급속히 붕괴되면서 전통적인 꽃놀이도 자취를 감추고 말 았다. 그와 함께, 생동하는 봄기운에 의지해 겨울의 묵은 때를 훌훌 털고 마침내 자연과 하나됨을 즐겼던 옛 사람들의 풍류와 정신도 맥이 끊겼다.
비록 세상과 사람 모두 변했지만, 옛 사람들이 즐기던 꽃놀이의 근본 취지는 오늘날에도 되살려봄 직하다.
***이 글에서 밝힌 개화기는 에년의 개회시기와 각종 기록, 기상청이 발표한 올해의 개화 예상시기 및 필자의 최근 현지답사 결과 등을 종합해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제때 꽃구경을 하려면 미리 지자단체나 지역 주민을 통해 만개 시기를 알아보고 길을 떠나는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