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대한적십자사 광복절 동행 프로젝트 3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고통, 79년째

전세계 원폭 피해자
10명 중 1명은 한국인입니다.

스크롤해서이수용 할머니의
이야기 들어보기

  • 만나다
    :히로시마,
    한순간의 섬광과 긴 암흑

    경남 합천군에 사는 이수용 할머니는
    1928년생. 올해로 아흔여섯입니다.

    이젠 몸이 약해져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방금 무슨 질문이었냐고 되물으며 기자 쪽을 향했습니다.

"아, 그날을 기억하느냐고요?"

그날.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녹아내린
도로와 건물

일본 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 모습

불에 탄 채로
길 위에 놓인 시신들

히로시마 원폭 투하 후 거리

다른 기억이라면 가물가물하다던
할머니의 눈빛은 또렷해졌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본에서 함바집(간이 식당)을 하던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 왔던 한국인 소녀.

주산에 밝았던 열일곱 이수용은 학교를 마치자마자 히로시마 저금국에서 사무를 봤습니다.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여느 때처럼 거기 있었죠.

그리고 소녀의 삶을 뒤바꾼 건
그날 단 한 번의 섬광이었습니다.

주저앉는 듯한 굉음. 놀라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불이 번쩍했답니다. 건물이 흔들리고 소녀는 쓰러졌습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사무실은 엉망진창에 온통 피범벅이었습니다. 창문에서 쏟아져내린 유리가 왼쪽 발등에 박혀 있었고요.

피 흘리는 불편한 발을 끌고 소녀는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한쪽 다리를 잃은 채였습니다. 믿고 따르던 큰 오빠도 자신처럼 무너진 건물 때문에 크게 다쳐 누워 있었습니다.

제때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 곧 일본에 미국 군인들이 들어오고, 여자들을 다 끌고간다는 소문이 돕니다. 이미 그런 위협을 겪어본 할머니 가족은 화들짝 놀라 딸을 지키기 위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다시 부산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들에게 치료를 지원할 때 이들 가족은 그런 지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갔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계신 이곳 경남 합천군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 내 다른 한국인 피해자 분들도 같은 얘기시더군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인지도 몰랐죠."

할머니는 지금도 왼발에 압박 스타킹을 신지 않으면 불편해서 걸을 수조차 없다고 하십니다. 30여년 전엔 암으로 인해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방사능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지만, 질병과 피폭의 연관성을 입증할 길이 마땅치 않습니다.

할머니는 한국으로 건너와 부산 남포시장에서 구제옷을 팔고, 과일을 팔면서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때 다친 왼쪽 발을 끌면서요.

할머니는 7월 15일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파견한 일본인 의사를 만나서도 기자에게 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몸이 불편하다고,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한다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말입니다.

다시 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폭 피해자가 많은 나라입니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폭이 떨어지고, 이틀 동안 69만 명(23만 명 사망)이 피폭되죠. 그중 무려 7만여 명이 조선에서 건너온 한국인이라는 점은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총 피폭자69만 명

69만 명 중 한국인 피폭자
7만 명

원폭 피폭자 10명 중 1명꼴로
한국인이었다는 뜻입니다.

    • 한국인 피폭자 7만 명,
      어느 정도일까요?
    • 경기 과천시
    • 8만5000명
    • 한국인 피폭자 7만 명,
      어느 정도일까요?
    • 강원 속초시
    • 8만 명
    • 한국인 피폭자 7만 명,
      어느 정도일까요?
    • 충남 예산군
    • 7만8000명

1945년 해방 이후 일본 내 강제 징용 한국인에 대한 징용 해제가 이뤄집니다. 그해 9~10월에 몸을 실을 한국인들은 피폭자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배에 오릅니다.

피폭 생존자 3만 명 중 2만3000명이 한국에 돌아왔고, 차츰 줄어 현재 생존자는 1876명, 평균 나이는 82.4세입니다.

이제 한국인 피폭자들은 아픈 몸을 이끌고, 살 곳도 농사 지을 땅도 없이 고향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피폭자 다수는 질병에 시달리더라도 치료받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피폭 직후 발생하는 온갖 종류의 합병증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원폭 방사선 피폭에 의한 이른바 ‘원폭증’을 앓으면서도,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원폭 피해로 켈로이드화된 피부 때문에 한센병(나병) 환자로 의심받다가, 일할 기회조차 못 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후유증 중 하나였던 극도의 무기력증(부라부라 병)으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원폭증이란?원폭증(원자폭탄증)은 원폭이 폭발할 때 방출된 방사능에 노출돼 심각한 후장애를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열폭풍에 의한 외상, 열상에 의한 반흔 및 켈로이드부터 각종 소화기계질환, 내분비계질환, 신경계질환, 고도 소두증 등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다시 듣다
:관심이 필요한 이유

국내 원폭 피해자들에 대해 한일 정부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 정부는 일본 측 입장을 본 후 대응한다는 기조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 측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국 이슈가 아니라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밝혀왔고요. 이런 모습을 보면 양국 정부가 모두 껄끄러운 문제에 손대지 않을 명분만 찾았다는 비판도 가능하죠.

누군가는 가난으로 인한 일본행은 자발적인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해요. 하지만 이 역시도 크게 보면 피식민지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제국주의의 구조적 폭력과 분명 무관할 수 없을 겁니다.

한일 양국의 정부의 관심 뿐만 아니라, 인권 문제로서 접근과 관심도 중요하겠죠. 직접 피해자는 고령으로서 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습니다.

동아일보는 7월 15~16일 대한적십자사와 일본 나가사키현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국내 건강상담에 동행취재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됐다가 6년만에 재개된 행사였죠. 이날 참여한 분들이 아래와 같이 증언을 해주시더군요.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해 보입니다. 

  • 김승자 할머니

    1928년생, 경남 거창군 거주

    “ 9남매 중 유일한 아들이었던 남동생이 원폭으로 등이 싹 타서 죽었어요.”

  • 이덕구 할아버지

    1935년생, 경남 거창군 거주

    "원폭 이후엔 머리가 깨질듯이 자주 아파요. 근데 자식들도, 손주들도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해요. 피폭된게 자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요”

  • 전삼덕 할머니

    1937년생, 경남 거창군 거주

    "원폭 이후 몸이 계속 안 좋았어요. 한국에 와서는 이삭도 줍고, 남의 집에서 애기를 돌보며 살았어요. 자식 중 아들 하나 딸 하나는 쉰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동행 프로젝트 세 번째 이야기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 고통, 79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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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기획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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