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
1차로 도로 양쪽에는 철조망이 아래위 두 줄로 처져 있었고 철조망에는 이런 붉은색 위험표지가 달려 있었다. 민통선을 통과한 지 16분이 지나서야 후방 체크포인트(CP)가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버스로 갈 수 없어 지프로 갈아타야 했다. 온몸이 들썩이는 비포장도로를 10여 분간 달리자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 철책이 나왔다.
기자는 21일 총기난사 사건 현장 방문을 위해 국방부의 협조를 받아 방탄조끼와 방탄헬멧을 착용하고 휴대전화를 맡긴 뒤 다시 지프에 올랐다. 남방한계선 철책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있었던 경기 연천군 최전방 감시소초(GP)까지는 2km.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을 저지른 김동민(22) 일병이 근무하던 이곳은 남쪽 철책보다 오히려 마주보는 북한군 GP가 500m나 더 가까운 그야말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곳이다.
콘크리트 덩어리 GP=1980년대 초반에 만들었다는 GP 건물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건물을 둘러싼 콘크리트벽 두께는 30cm 정도였다. 페인트로 위장색을 칠했으나 거의 다 퇴색되고 일부는 벗겨진 상태였다.
내무반 입구에는 핏물이 고인 자국이 두 군데나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군번줄이 끊어진 인식표가 핏덩이 속에 박혀 있었다. 핏물이 아직 덜 말라 지나다니는 사람의 구둣발에도 피가 묻어나왔다. 벽에 남은 탄흔과 천장의 파편, 바닥의 피 웅덩이 자국, 습한 공기 때문에 속이 메스꺼워졌다.
참사 현장인 내무반=15평 남짓한 내무반 침상에는 장병들이 깔고 자던 매트리스가 깔려 빈틈이 없었다. 한 사람이 몸을 누일 수 있는 폭은 관물함과 꼭 같은 90cm 정도였다. 보풀이 인 국방색 이불은 한눈에도 몹시 더러워 보였다. 따로 빨래를 말릴 곳이 없었던 듯 형광등 커버마다 내의와 양말 등의 빨래가 옷걸이에 다닥다닥 걸려 있었다. 하늘색 페인트가 벗겨진 관물함에는 가족이나 친구와 찍은 병사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수류탄 폭파의 피해는 문으로 들어서는 오른쪽 편에 집중돼 있었다. 김 일병이 수류탄을 던진 곳도, 소총으로 지향사격을 한 곳도 그곳이었다. 수류탄이 터진 곳은 축구공 정도의 크기로 매트리스가 산산이 찢겨져 있었으며 그 일대 천장에는 거무튀튀한 손톱 크기의 덩어리들이 마구 붙어 있었다. 수류탄 파편이 아니라 이불솜과 살점이 섞여 천장에 붙은 것이라고 했다.
박의원 상병의 복부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바람에 수류탄 피해가 5060% 이상 줄었습니다.
헌병대 수사과장의 설명이었다. 박 상병의 시신은 자기 자리도 아닌 곳에서 관물함 아래에 머리를 두고 몸을 엎드린 자세로 발견됐다. 그러나 군은 박 상병이 수류탄을 덮쳤을 가능성은 아직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김종명 중위의 시신이 발견된 체력단련실은 핏자국이 바닥에 온통 흩어져 있었다. 즉사한 게 아니라 피를 흘리며 체력단련실 안을 돌아다니다가 숨진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탄흔들이 벽에 남아 있었다. 체력단련실 구석에는 온 사병이 함께 사용한 오디오가 한 대 있었고 그 주위로 진중문고들이 꽂혀 있었다. 만화소설 삼국지 등 고리타분한 책들이었고 종교서적이라고 써진 선반은 온통 성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에는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똑같은 제본의 신약성서가 12권 있었다.
언제 적이 나올지 모르는 곳=이 근처는 다 불에 탔던 곳입니다. 북한군이 겨울이면 불을 놓습니다. 언제 북한군이 나올지 모릅니다.
안내를 맡은 장교의 설명이었다. 이 장교는 GP 근무를 맡은 사병들에 대해 딱한 아이들이라고 말했다.
한창 나이 애들이 3개월 동안 한곳에서 꼼짝 못하고 24시간 내내 똑같은 얼굴이나 보면서. 전쟁이 나면 우린 꼼짝없이 죽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테죠.
문제의 GP를 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철조망으로 얼기설기 만든 감옥이라는 느낌이었다. 콘크리트 진지를 철조망이 한 바퀴 빙 두르고 있었다. 펜스 형태의 철조망 위에 원통형 철조망이 얹혀 있었다.
철조망과 그 안 건물 사이에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 GP 내 연병장은 일반 단독주택의 마당만 한 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