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굿바이, 신의 소리 포에버, 록의 대부

Posted April. 05, 2006 02:59,   

ENGLISH

세아들, 김종서, 박완규 등과 합동 공연

채 풀지 않은 이삿짐이 즐비한 그의 집은 창고 같았다. 그러나 그를 상징하는 기타 두 대는 그 어느 짐 보다 먼저 풀려 나란히 벽에 걸려있었다. 그에게 은퇴설이 사실이냐는 것부터 물었다.

제 나이 70이 다 돼 가요. 갈수록 내 음악은 너무 전문적이라는 평을 받고 내가 설 무대는 좁아지고, 벌여놓은 작업은 많은데 한 번도 정리한 적은 없고 은퇴가 결국 임박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요?

음악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건가요.

오히려 강해졌다고 봐야죠. 요즘 가요는 아마추어들의 잔치 같아요. TV를 켜면 음악은 오락 프로그램의 일부분으로 전락했고 사람들은 얇은 음악에 열광하고. 은퇴라는 거창한 말보다는 신중현이란 사람이 이런 음악도 했구나라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기회라고 해둘 게요.

은퇴의 방식으로 선택한 전국 투어에 대해 그는 기대에 차 있었다. 진정한 프로페셔널 음악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줄 터이니 수준 높은 관객들이 와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진정한 뮤지션은 끊임없이 창작해야 한다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듯 은퇴무대에서 그가 만든 신중현 3-3 주법(세 음을 세 손가락으로 연주하는 기법)을 처음 선보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종서, 박완규 등 그가 아끼는 젊은 가수들과의 합동 공연에 이어 대철, 윤철, 석철 등 그의 아들 3형제와 함께 꾸미는 가족 연주로 마무리를 지을 예정이다.

음악이 오락화 하는 것이 걱정

1962년 한국 최초의 로큰롤 밴드 애드 포 결성, 이후 조커스, 덩키스, 엽전들, 뮤직파워 등을 결성하며 그는 그룹사운드 문화를 정착 시켰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 장현 등 신중현 사단이라 불리는 인기 가수들에게 곡을 주고 음반을 내게 했다.

해방 이후 한국 록 음악의 산 증인으로 꼽히는 그이지만 허전하다는 말로 50여 년을 회고했다.

뭐 그동안 무진장 노력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몰라요. 음악성 있는 음악은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는 이 나라의 음악 산업이 싫어요. 갈수록 음악이 오락화 하는 것 같아 후배들이 큰일이죠.

그는 현재 자신의 음악을 집대성한 DVD 작업을 혼자서 하고 있다. 님아, 님은 먼 곳에 같은 히트곡 100여 곡의 뮤직비디오를 혼자서 찍고 편집하고 또 그의 모든 음악 활동 및 영상, 기사 등 신중현 50년을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sjhmvd.com)에 고스란히 옮겨 놓고 있다.

16세 때 친척집에서 뛰쳐나와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헝그리 정신 때문이죠. 70이 다 된 내가 지금도 기타를 칠 수 있는 것도 그 때 경험 때문이에요. 이제 은퇴를 하고 내가 죽어도 사생활까지 모두 음악이었던 한 오래된 가수가 있었다는 것을 후배들이 알아주었으면 해요.



김범석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