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생단은 1930년대 초 일제가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이뤄진 동만주 지역의 항일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만든 공작 조직이다. 민생단의 첩자 몇 명이 체포되자 중국인들은 무고한 조선인들을 총살했고, 조선인 간부들도 서로 살기 위해 동료를 민생단원으로 고발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불과 8, 9명 정도의 민생단 혐의자 때문에 2000명 이상의 공산주의자가 자기 편에게 학살됐다고 썼다. 북한은 이 때의 잘못을 반복하지 말자며 주민들에게 민생단 사건에 대한 정신교육을 지겹도록 시킨다.
2006년 일심회 간첩사건의 총책인 장민호는 교도소에서 쓴 편지에서 통합진보당 사태는 민생단 사건과 비슷하다고 밝혔다. 통진당 홈페이지에 실린 이 편지는 비례대표 부정경선에 대해 역사적으로 외세가 우리들에게 강요, 허용한 형식적 민주주의라고 일축했다. 당권파 소속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사퇴를 요구하는 혁신파와 언론을 싸잡아 종파주의자에 규정했다. 선거 부정을 덮고 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리는 상투적 수법이다. 장민호는 북한식 어투를 자주 사용했다. 특히 김정은 3대 세습에 대해선 대()를 이은 선군()정치 역량의 증대라고 치켜세웠다. 이러니 뼛속깊이 종북()주의자라는 얘기가 나올 만 하다. 그가 일심회의 대북()보고문에서 북한을 조국이라고 표현한 게 빈말이 아닌 모양이다.
통진당 홈페이지의 당원 게시판에는 장민호를 비난하는 댓글이 이어졌다. 실제 간첩 질을 해서 진보를 색안경 끼게 보게 만든 사람 당의 심장을 북한에 팔아먹은 사람. 그를 옹호하는 것을 동지라 보기 어렵다고 봐요 등 등. 장민호는 2008년 종북주의 논란으로 통진당의 전신인 민주노동당을 두 동강 낸 장본인으로 꼽힌다. 당 일각에서는 이 편지가 종북주의를 청산하려는 쇄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장민호가 당권파 사수를 촉구한 것은 29일로 예정된 통진당 전당대회를 의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권파의 동요를 막고 중간지대의 정파를 끌어들여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되찾아야 이, 김 의원 제명안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철 지난 종북 메시지로 쇄신의 대세를 막을 수 있을까. 북한과 물밑 교감을 했다면 더 어리석은 일이다.
정 연 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