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을 찢을 듯한 헬리콥터의 기계음과 힘없이 지상에 서있는 것들에 대한 융단 폭격의 굉음, 그리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바그너의 발키레의 비행(Ride of the Valkyries).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장엄한 협주곡을 배경으로, 헬리콥터의 힘겨운 날개짓과 폭격의 검붉은 불꽃이 화면을 가득 채웠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파괴하고 인간을 사냥하며 전쟁을 즐기는 인간의 광기에 섬뜩해 했었다. 이 영화는 바로 처참한 살육과 파괴로 얼룩진 인간의 20세기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러나 9월11일 미국의 심장부에 가해진 테러, 아직 그 희생자 수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그 폭력을 보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환호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적지 않은 사람들 또한 통쾌해 하고 있다. 목숨을 건 반미 전쟁의 전사로 자원하는 이슬람의 젊은이가 줄을 잇고, 미국의 청년들은 이들을 응징하겠다며 군에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1991년을 기억한다. 걸프전이 터지자 사람들은 매일 밤 9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지는 미니시리즈 걸프전을 시청했다. 전쟁터에 고통받고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별다른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첨단 살상 무기가 정확히 목표물을 가격하는 장면에 탄성을 지르며 그 건물이 산산조각 날 때 무너지는 인간의 희망은 함께 잊혀지곤 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유태인대학살을 비롯해 곳곳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폭격. 이는 모두 20세기에 자행된 인류의 씻을 수 없는 죄악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된 인간이 자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저지른 과오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자며 수없이 반성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번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과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을 지지하며 전쟁 불사를 선언하고 나서는 사람들, 그리고 세계 평화 수호라는 이름 아래 테러의 발본색원을 외치며 결의를 다지는 미군과 다국적군은 서로를 겨누고 성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난 세기의 전쟁에서도 그러했듯이 이들 성전에 뿌려진 성수()는 이미 분노와 증오로 오염돼 있다.
그래도 지난 세기의 뼈아픈 경험이 헛되지 않았기에, 이런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테러와 보복의 기나긴 수렁에 빠지는 신호탄이 되리라는 경고, 미국의 대()테러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권과의 세계 대전으로 번지게 되리라는 전망, 미국의 공격은 뉴테러리즘이라는 새로운 전쟁 방식으로 이슬람권을 결집시키려는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
그럼에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인간들의 합리적 판단력을 한없이 흐려놓았던 숱한 역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하기에는 지난 세기의 희생이 너무 컸다.
만일 삶의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하나의 성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념과 종교와 인종과 민족이란 이름 아래 굴종과 결사항전 사이의 양자택일을 강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폭력을 정당화해 주는 독선과의 성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