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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엔약세 품질개선 기회로

Posted December. 21, 20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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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지난 10년간 장기불황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진단이 가능하겠지만, 통화 및 재정정책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은행 부문의 부실 정도는 파산위기에 버금가는 것으로 시장은 평가하고 있다. 같은 기간 미국이 신경제의 기적을 쌓아 가는 동안 일본은 경제성장이 멈추고 구조적 병폐를 전혀 치유하지 못했다. 올 들어 일본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있고, 실업률이 급상승하고 있으며, 닛케이주가는 최고 수준의 25%로 급락해 12년 전의 수준에 불과하다. 심각한 디플레이션(물가하락)이 확산되고 있으며,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1992년 이후 지금까지 63조엔의 부실채권 정리에도 불구하고 현재 부실채권 규모는 66조엔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 은행권의 순자본이 14.5조엔에 불과하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최근 국제 신용평가기관들이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일제히 하락시키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당분간은 일본 경제가 회복될 희망이 없어 보인다.

최근 일본은 국제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상황에서 통화신용정책의 기틀로서 물가목표제를 정착시키려 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일본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 일정 수준의 물가상승률 목표를 정책적으로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통화신용공급을 조절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아무리 통화공급을 늘려 이자율을 하락시켜도 투자심리는 회복되지 못하는, 이른바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이 일본의 현실이다.

이런 유동성 함정 아래에서 통화신용정책은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일본 국채를 매입하도록 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주식을 포함해 부동산채 등 다양한 실물자산 및 금융자산을 매입해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회복시키자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은 공개시장조작을 통한 전통적인 통화신용정책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임시방편적인 것이다.

일본 중앙은행이 확대 신용정책을 펼 경우 궁극적으로 엔화는 약세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 중앙은행의 최근 행태를 보면 사실상 일본 국채보다는 미국 재무부증권 매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미 테러사건 이후 일시적으로 달러가 약세를 보이자 일본은 즉시 엔화 약세를 도모하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했고, 그 결과 외환보유액이 급속히 증가해 11월 현재 일본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보유액은 4000억달러를 초과하고 있다.

사실 일본은 자유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재무부가 외환정책에서 모든 정책결정권을 쥐고 외환시장에 개입하고 있다. 대다수 일본의 정책담당자들은 수출만이 일본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지닌 것 같다.

그렇다면 엔 약세를 통한 일본경제 회복이 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일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지만, 엔 약세가 통화신용정책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조장된 것이라면 많은 문제점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만이 수출을 통해 경제를 회복시키려는 전략은 이웃 국가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정책임에 분명하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도 약세로 갈 수밖에 없다. 엔화가 약세를 보이자 즉시 한국에 유입되던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시아 금융위기도 상당부분 엔 약세에 기인했던 측면이 있다. 엔 약세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금융위기의 재발 가능성을 부추기는 위험요인이라 생각된다.

엔화와 원화는 그동안 강한 동조성을 보여 왔으나 최근 우리나라의 국가신용등급이 상향조정되는 분위기를 감안할 때 엔화가 약세를 지속할 경우에도 원화가 큰 폭으로 절하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원화 약세를 조장하기 위해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현명한 조치라 할 수 없다. 우리 수출기업들은 당분간 환율 불안정에 대비해 환위험 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환율에 의존하기보다는 품질개선과 마케팅 강화와 같은 비가격 경쟁력을 제고하는 데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왕윤종(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거시금융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