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to contents

[오피니언] 전성시대

Posted January. 05, 2002 13:40,   

ENGLISH

지난해 여름 책 관련 칼럼에서 조선시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룬 일이 있었다. 나라의 기강도 없고 지배층의 책임감도 없는 것의 사례로 우리 군사끼리의 살육 삽화를 적었다. 용궁 현감 우복룡이 경상도 영천의 길가에서 밥을 지어먹고 있는데 하양 군사 수백 명이 방어사에 예속되어 북으로 가다가 말에서 내리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그러자 우복룡이 부하를 시켜 그들을 포위하고 반란군이라며 모두 살해해 들에 시체가 가득하였다는 책 속의 대목이었다.

얼마 후 우복룡의 자손이라는 이의 항의 편지를 받았다. 일방적으로 왜곡 매도했다며 우복룡의 공적이란 것들을 나열했다. 한말 고종 때 승지의 차남인 시인 오장환은 자기네 족보를 두고 우리 할아버지가 진실로 오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고 노래했지만 조상 숭배와 족보 숭상은 여전한 것 같다. 글로벌시대인 오늘에도 옛 씨족사회의 잔재가 남아있는 셈이다.

잡담 그만두고 나의 조상과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가까운 몇 세대 전의 조상이라 하더라도 그의 공적이 나의 자랑일 수는 없고, 그의 비행이 나의 수치일 수도 없다. 이러한 생각의 내면화없이 근대적 개인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지역주의가 수평적 족보주의라면 족보주의는 수직적 지역주의다. 모두 청산되어야 할 구시대의 폐습이다.

21세기로 접어든 오늘 우리는 선례에 대한 참조없이 우리 사회와 역사를 열어 가야 할 처지에 있다. 가령 경제성장이 지상 목표가 되어 있던 196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구미 산업사회라는 선례가 있었다. 그들의 성패와 시행착오를 참조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또 변혁론자들은 사회주의 모형을 참조기준으로 삼기도 하였다. 고전적 비교 모델이 소멸하고 두뇌산업이 보편화된 글로벌 시대인 오늘날 이미 선행 사례라는 참조항은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현재 상황의 면밀한 검토를 통해 우리의 길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에게 커다랗게 떠오르는 것이 역사다. 우리의 과거사에서 교훈과 지혜를 찾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는 아무도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는 귀머거리와 같다는 비유를 통해 톨스토이는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일이 부질없다고 말하였다. 과연 그럴까.

요즘 우리 사회에는 사극 애호가들이 많다. 특히 중년층 이상의 시청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프로여서 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극이 흔히 화제가 되곤 한다. 역사를 모의 집단의 음모과정으로 파악해 흥미 본위로 엮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지나간 한 시대의 조명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를 검토할 기회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고려 건국이나 한말이라는 시대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아두고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할 시기일 것이다. 자신의 객관적 파악이란 언제 어디서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없이 지혜롭고 합당한 선택이나 행동은 기약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자에 널리 읽히고 있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인 이순신의 실존적 고뇌를 다룬 이 작품은 역사소설의 통상적인 뼈대를 깨뜨린 이색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가령 누군가를 끊임없이 죽임으로써 권력의 작동을 확인하고 있는 것같은 임금, 얼굴 가운데 코가 있기 때문에 죽어야 하는 피란민 등이 간결한 문체 속에서 되살아난다.

우리는 이 소설을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함께 읽음으로써 임진왜란에 대한 이해를 더욱 두텁게 할 수 있다. 거기에다 징비록까지 읽는다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뒷날 일본 해군조차 존경해 마지않아 해마다 진해에서 위령제를 지냈다는 이순신은 당시 투옥되고 백의종군까지 했다. 이것이 에누리없는 지난날의 우리 모습이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임진왜란 이후 호란을 거쳐 망국에 이르는 과정은 역사가 결코 아무도 묻지 않는 것에 대답하는 귀머거리가 아님을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조상의 공적이나 비행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해서일수록 비판적 안목을 구사하면서 우리의 오늘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왜란과 호란을 각각 두 번씩 겪는 어이없는 조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종호(연세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