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 대선에서 승리하던 날, 수도 워싱턴에서 벌어진 거대한 축하 리셉션에 참석한 그의 선거 참모들은 모두 18세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초상이 새겨진 넥타이를 매고 등장했다. 쫓고 쫓기는 긴 선거전에서 그들이 승리 후의 상징물까지 준비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궁금한 것은 왜 하필 애덤 스미스인가 하는 점이다.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 이론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푸줏간 주인이나 대장간 주인이나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그 행동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결과적으로 국가의 부()를 증진시킨다는 얘기다. 따라서 정부는 그 과정에서 최소한의 역할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담은 국부론은 햇수로 4세기에 걸쳐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경제학서로 인정받고 있다. 딱딱한 경제학 얘기를 한 이유는 레이건의 선거 참모들이 왜 애덤 스미스 넥타이를 매고 나타났느냐에 대한 설명 때문이다.
8년을 집권한 레이건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일관되게 정부의 규모를 줄였고 재정을 축소했으며 철저한 시장주의적 정책을 택함으로써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 경제사상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결과 천문학적 규모의 나라 빚은 줄기 시작했는데 그 과실을 따먹은 장본인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었다. 이 사례는 대통령의 경제철학이 그가 물러난 이후에도 얼마나 오랜 기간 나라 경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야흐로 대선의 계절을 맞아 나라 전체가 온통 정치판이다. 치밀하게 조직된 세력들은 인터넷에 올라타 바람몰이에 한창이고 미주알 고주알 상대의 약점이 될 만한 소재들은 논리적 설득력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상대를 겨누는 비수가 되어 하늘을 가득 날아다니고 있다.
그 비수에 맞아 어느 후보가 상처를 입든, 그 선동으로 얼마만한 사람들이 판단력을 잃고 헤매든 그런 것은 차라리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정말 이 나라의 대권이 애덤 스미스를 추앙하고 실천할 만한 시장주의자에게 주어질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선택의 대상이 아니고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만큼 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충분히 입증된 시스템이다.
그런 차원에서 경선에 나선 여야의 후보들이 이 체제를 신봉하는지 여부에 대한 이념적 검증은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과정이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놓고 구시대적 색깔론이라는 식의 역공으로, 말하는 이의 입을 닫게 하고 궁금해하는 이들의 귀를 덮게 해서는 안 된다. 색깔론은 안 된다니, 그게 무슨 핵우산이나 방파제쯤 되는가. 그 뒤에 숨기만 하면 모든 사상이 보호받을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근로자들 앞에서 그들이 주인 되는 세상을 부르짖었던 기록, 국회에서 재벌들의 주식을 근로자들에게 나눠주자고 했던 발언, 언론사 소유지분을 제한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것이 우리가 주창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또 시장경제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당사자가 확실히 밝히고 지나가야 한다.
장()의 논리 혹은 매카시적 수법이라는 정도의 답변으로는 중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저쪽에 가서는 저들을 한층 치켜세우고 이쪽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져 생각도 변했다는 식이라면 자칫 양쪽 모두의 가슴에 배신감을 심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도 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려면 그 날개가 밀랍으로 만들어진 건지 무쇠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검증받을 의무가 주어진다.
아울러 그렇게 상대를 비판하고 나선 후보도 강자가 될 때에 대비해 당신이 노동부장관 시절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미리 답변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공격하는 쪽이나 공격받는 쪽이나 모두 일반 국민이 섬뜩하게 느낄 말들을 많이 해 왔는데 그 당시와 지금의 생각이 다르다면 어떤 이유로 생각이 변하게 됐는지 또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국민은 그들의 주장을 매우 신중하게 경청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백화점에서 대충 설명만 듣고 냉장고 하나 집에 사들이는 그런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혼란스럽다. 역대 어느 선거에서 볼 수 없었던 살벌하고 음산한 기운이 나라 전체를 뒤덮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사회적 갈등과 이념적 괴리가 커지고 있는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의 최종 소비자인 국민의 냉철한 선택이다. 우리도 과연 애덤 스미스의 초상을 새긴 넥타이를 대통령 당선잔치에서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규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