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 삼선교쪽에서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 초입 오른쪽엔 간송미술관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10만석 재산을 모두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한 간송 전형필( 190662) 선생이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설립한 것이다.
설립 당시 이름은 보화각(쎷)이었다. 간송이 1962년 타계하자 3남 영우씨가 보화각을 이어받았고 1966년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권유로 박물관 학예직이었던 최완수씨가 보화각에 들어가 영우씨와 의기투합,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세우고 보화각의 이름을 간송미술관으로 바꿨다. 최씨는 연구실장 자리에 앉았고 이후 그가 작품 관리 및 연구 등의 실무를 책임지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국내 사립 박물관 중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한국 문화재의 보고다. 국보 72호 계미명() 금동삼존불, 국보 73호 금동삼존불감, 국보 68호 청자상감 구름학무늬 매병, 국보 74호 청자 오리모양 연적, 국보 70호 훈민정음, 국보 71호 동국정운,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 그리고 겸재 정선의 금강산 산수화, 추사 김정희의 글씨,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등등.
간송미술관의 소장품이 대략 50006000점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몇 점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송미술관측은 이를 밝히지 않고 있다.
간송컬렉션은 서화와 도자기에서 두드러진다. 특히 서화에서 한 작가의 명작을 100점 이상씩 수집했다는 것이 간송컬렉션의 특징. 그래서 겸재 정선 회화, 단원 김홍도 회화, 추사 김정희 서화, 오원 장승업의 회화는 모두 100점 이상씩 소장하고 있다. 따라서 간송미술관을 뒤지지 않고는 이들의 작품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오원이 1897년 타계했다는 사실이나 신윤복의 본명이 신가권()이라는 사실 모두 간송컬렉션이 있었기에 알아낼 수 있었다.
설립자인 간송은 문화재 수집 차원을 넘어 당대 문화계의 최고의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였다. 간송은 1950년대 중앙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화가 고 장욱진이나 권옥연에게 간송미술관 직원 월급날 함께 월급을 주기도 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고 김원룡과 고 최순우에게 각각 삼불과 혜곡이란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2층짜리 미술관 건물도 눈길을 끈다. 한국 최초의 건축가로 서울 종로의 옛 화신백화점을 설계했던 박길용의 작품. 지금은 오래되고 평범한 건물로 보이지만 이탈리아제 대리석으로 계단을 만들고 2층에 원형 공간을 만드는 등 당시로서는 세련되고 모던한 분위기의 최고급 건물이었다. 이 건물 자체도 이제 하나의 문화재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간송미술관은 상설 전시를 하지 않고 매년 봄 가을 두 차례만 전시회를 갖는다. 그것도 딱 2주 동안만. 전시를 너무 하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 최 실장은 공개가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연구가 이뤄지고 나서 전시가 열려야 한다고 못박는다. 이번 전시는 19일부터 6월2일까지다. 월드컵 분위기를 고려해 일정을 좀 연장할 의향이 없느냐는 질문에 최 실장은 단호하게 없다고 말한다.
전시를 해도 작품은 소장품으로 제한하고 외부에서 유물을 빌려오는 법은 절대 없다. 또한 간송미술관은 소장품을 외부에 잘 대여해주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간송미술관의 이같은 고집에 대해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이 최고 컬렉션으로서의 간송미술관의 자존심이자 최 실장의 고집 그대로다.
최 실장의 이런 고집은 후학 양성에서도 두드러진다. 최 실장은 1975년 서울대 강의를 통해 인연을 맺은 후학들을 80년대부터 이곳에서 철저하게 도제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공부에 앞서 빨래도 잘 해야 하고 밥도 잘 지어야한다. 그렇게배출해 학계에서 자리잡은 제자들은 40여명. 한국사의 정병삼 숙명여대 교수, 지두환 국민대 교수, 유봉학 이세영 한신대 교수, 철학의 김유철 연세대 교수 등. 강경구 조덕현 같은 화가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