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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대통령 4년중임제 개헌론

Posted June. 03, 2002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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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지 15년이 다 되어간다. 아스팔트를 달구었던 그 6월의 구호들도 15년의 세월과 함께 망각 속으로 잦아든 듯하다. 헌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주장이 부쩍 힘을 얻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요지인즉 대통령 임기를 5년 단임에서 4년 중임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당장 헌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비상사태라도 벌어질 듯 이들은 호들갑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한두 번 속여왔던가. 그 주장대로 과연 늑대가 나타날 것인지는 의문이다. 의원내각제니 부통령제니 양원제니 하면서 국민의 눈을 현혹해 총리 부통령 참의원 등의 자리를 스리슬쩍 끼워 넣고 가련한 호주머니를 또 털어낼 속셈은 아닌지.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의 역작 황금가지에서는 탈라베티파로티암이라는 남인도 제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5년 동안 전제군주의 절대권력을 부여하되, 기간이 만료되면 원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그 목을 잘라 허공에 던져 올린다. 원주민들은 다투어 떨어지는 목을 주우려 하는데, 이를 주운 사람이 다음 5년 임기로 같은 자리에 임명된다. 아, 1987년 제정된 우리의 대통령제 헌법이 지나온 저간의 사정과 어찌 그리 흡사한가! 파한 잔칫상 앞에서 참수만을 기다리는 대통령의 모습, 새로 굿판을 벌여 그 참수된 머리를 주우려 광분하는 후보자들, 그리고 멀찌감치 이들을 바라보는 국민의 싸늘하게 식은 눈길.

4년 중임제 개헌론의 주장에 따르면 5년은 소신을 실현하기에 너무 짧으며 단임제로는 정치적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임기의 장단이란 결국 상대적인 문제일 뿐이다. 무능한 대통령을 참고 견디는 데 5년 세월이란 충분히 긴 것일 수 있다. 중임제만이 대통령의 책임을 추궁하는 유일한 장치는 아닐뿐더러, 그 중임이 1차에 제한되는 한 추궁되는 책임 또한 1차에 제한되는 부분적인 것이다.

지난 헌정사의 경험을 되새겨 볼 때 오히려 심각한 위험은 현직 대통령이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해 재선에 임하는 정면대결의 상황에서 초래되었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과감한 정치군인 제거와 김대중 대통령의 전향적 대북정책 추진도 단임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 불일치도 문제라고 한다. 대선 총선을 나란히 치러 집행부와 입법부의 지배세력을 일치시키고, 이로써 해마다 선거가 실시되는 부담도 줄일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대선과 총선이 실시되는 시점과 여소야대의 문제상황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오히려 1948년의 건국헌법은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대선과 총선의 시기를 정확하게 한 중간에서 엇갈리도록 디자인해 놓았다. 임기 불일치만이 문제라면 국회의원 임기를 5년으로 늘리는 방법도 있을 수 있으므로 반드시 대통령의 임기를 손댈 필요는 없다. 대통령(5년)과 국회의원(4년)의 임기가 불일치 교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정확히 20년을 주기로 되풀이되는 예견 가능한 순환이므로 그로 인해 완전 미지의 정치적 혼란상황이 초래되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의 임기문제는 우리 헌법의 뇌관에 해당한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그곳을 잘못 건드려 폭사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는 헌법 제70조에는 우리 헌정사 반세기의 결론이 녹아 있는 것이다. 요즘 일부 정치인들의 개헌 주장을 듣노라면 폭발물을 갖고 노는 아이들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생각해 보라. 개헌에 요구되는 안정적 다수인 재적 의원 3분의 2가 쉽사리 확보되겠는지를. 19882000년 네 차례의 총선에서 원내 과반수조차 형성하지 못했던 우리 정치인들 아닌가.

미국의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가 비교헌법공학에서 든 비유를 좀 변형시켜 본다면, 우리의 정치는 마치 만취한 운전자가 폐기 직전의 중고차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 같다. 여기서 운전자를 정치인에, 자동차를 정당에, 도로를 헌법에 대응시켜 보자. 무협지에나 등장하면 딱 맞을 정치 건달들이 지역제후의 방파()를 이리저리 떠도는 작금의 현실에서 헌법이 잘못되었다느니 고쳐야 한다느니, 이 무슨 가소로운 일인가.

찬란한 미국의 헌정도 헌법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헌법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이라지 않은가.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대권 후보들도 섣부른 개헌론보다는 헌법학도의 도로 안내를 귀담아 듣기 바란다.